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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6 00:00

<genron 3>의 아즈마씨의 서문 마지막 부분: 한국의 '나쁜 장소'론 번역


최후에, 또 한가지의 논점을 부가하고 싶다.

가토는 '패전후론'에서, "전후라는 이 시대의 본질은, 그곳에 일본이라는 사회가 이를테면 인격적으로 두 갈래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에 있다." 고 쓰고 있다. 패전의 상처는 일본의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분할시켰고, 그것에 응하는 형태로 언설또한 분할되어 버렸다. 그 분할은 일반적으로, 보수와 혁신, 우익과 좌익, 개헌과 호헌이라는 정책이나 세계관의 대립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토는, 그것은 오히려 인격적 분열이며, 일본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무엇인가라는 감각의 차이야말로 대립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가토의 이 지적은 예리하다. 그것은, '패전후론'의 출판으로부터 약 20년, 넷 상에서 '넷수꼴'과 '넷좌빨'의 논쟁이 매일 반복 확대되고 있는 2016년 지금 이 시점에 더욱 유효하다. 넷수꼴과 좌빨은, 정책 등에 대해 의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충돌하고 있는 이유는, 헌법을 바꾸는 것과 지키는 것, 중국, 한국을 비난하는 쪽과 받아들이는 쪽, 둘 중 어느 쪽이 제대로된 일본인인지 그 감각이 애초 어긋나 있기 때문임에 다름아니다. 단지 가토는 그 분열에 대해 '내향적 자기'와 '외향적 자기'라는 공간의 비유로 말하고 있다. 우익이 내향, 좌익이 외향이라는 정리이지만, 패전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러, 한편으로는 넷수꼴적인 언설이 평범하게 국외로 흘러가는 것이 되고, 다른 한편 전후민주주의적인 감성을 타테마에建前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내면화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역사적 기원으로 돌아가 정리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본인은 지금, 두 가지 다른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두 가지 '우리들'을 가지고 있다. 한 편으로, 1868년의 메이지유신에 기원을 가지고, 제 2차대전의 전사자를 동포라고 감각하는 국가주의자인 '우리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1945년의 '종전'에 기원을 가지고, 제2차대전의 아픔을 마치 외국에서 있었던 일처럼 감각하는 전후민주주의자인 '우리들'이 있다. 전자로부터 한다면 일본국 헌법이 점령군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후자로부터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우리들'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된다. 후자에 있어서 전전(戰前)의 모든 우행들은 '우리들' 이전의 군국주의자들이 범한 범죄에 지나지 않지만, 전자에 있어서는 그러한 절단이야말로 경악할만한 건망증이며, 선조들에 대한 외경의 결여라는 것이 된다. 일본인은, 한편으로는 과거를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양자를 모순없이 공존시키고 있다. 즉 전후의 일본인은 이중인격자인 것이다.

전후 일본이라는 '나쁜 장소'는, 우리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역사인식을 멤도는 국외의 의론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성가신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일본인은, 여러 외국, 중국이나 한국에서 보자면, 지금(리베럴이) 부정한 것을 바로 (보수가) 긍정하고, 역으로 지금 (보수가) 긍정한 것을 바로 (리베럴이) 부정한다는 일종의 인격파탄자로 보일 것이다. '나쁜 장소'에서 산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토는 "하나의 인격으로의 회복을 위해서, 어떠한 방법이 우리들에게 있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쁜 장소'는 반드시 일본만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번 취재에서, 서울에 있는 3개의 역사 박물관을 돌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쟁기념관,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본통치기 형무소가 있던 곳에 지어진 박물관으로, 당시의 옥사가 전시실이 되어 있다. 일본인통치자(일제)에 의한 고문을 재현한 인형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본의 우익들 사이에서는 반일 프로파간다의 거점으로서 악명 높다. 전쟁기념관은, 그 이름대로 전쟁을 주제로 한 박물관이지만, 전시들의 대부분은 조선전쟁(6.25)의 기록에 할애되고 있고, 실질적으로는 조선전쟁기념관이라고 불러도 지장이 없다. 기념관 앞에는 조선전쟁에서 한국을 지원한 국가들의 깃발이 나열되어 있고,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가 서 있다. 정치색이 매우 강한 시설이지만, 광대한 부지에 전차나 전투기가 나열되어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있다. 최후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광화문 가까이에 2012년 개관한 새로운 박물관으로,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식민지시대나 조선전쟁을 다루고는 있지만, 역점은 지금의 한국이 어떻게 민주적으로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는지에 맞춰져 있고, 정치색은 의외로 엷다.

3개의 박물관은 어느 것도 한국의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이해하기 위해 불가결한 시설이고, DMZ 투어의 수용을 기사로 하기 위해서도 참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방문지로 고른 것이지만, 관람을 끝내고 나는 역으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들 3가지 박물관은,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즉 '우리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에 있어서, 각기 다른 연대에 기원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반일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우리들'의 역사는 1919년의 대한민국임시정부(망명정부) 수립까지 확장된다. 그 전제 위에서 처음으로, '일제'가 독립운동의 투사들에게 가한 폭력을 지금도 이어지는 비극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전쟁기념관의 역점은, 전술한 것처럼 조선전쟁에 두어져 있다. 그런고로 이번에는 1948년의 대한민국 수립선언이야말로 결정적인 날이 되고, 동포와의 전쟁이 마치 침략자로부터의 조국해방전쟁인 것처럼 그려지는 것이 된다. (실제로 조선전쟁은 북조선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 기념관의 기나긴 전쟁전시를 벗어나면, 관객은 원형의 공간으로 인도된다. 벽면에는 '자유'와 '평화'의 문자가 각국어로 쓰여져 있고, 중심의 백남준을 연상시키는 멀티 채널 인스터레이션은 환성을 내는 민중이나 포를 쏘는 전함의 영상이 계속 재생된다.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우리들이 진짜 '우리들'이 된 것은 북조선이란느 나쁜 분신을 때려눕혀 배제한 후부터라는, 일제 타도와는 이질적인 또 하나의 건국이야기이다.

그리고 최후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3번째의 분할선이 나타난다. 그것은 1987년의 제6공화국의 탄생, 즉 '민주화'라는 분할선이다. 동 박물관의 1980년대를 다루는 전시실의 판넬(일본어 번역이 있다)에는 "야당 정치가, 학생, 지식인, 노동자의 피가 스민 민주화 투쟁이 확대되어" "민주주의는 드디어 1980년대 후반에 승리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현대 한국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여기서 제 5공화국 이전의 군사정권에게 '승리'하여, 그것을 때려눕힌 새로운 우리들로서 재정의되는 것이 된다. 이 최후의 분할선의 존재를 눈치채었을 때, 나는 어째서 한국인의 일부가 1965년에 맺어진 일한기본조약을 존중하려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독재정권하에서의 한국정부의 결정은 '우리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압재자에 의한 강압이고, 현재의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감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아이덴티티는 적어도 3개의 '우리들'이 겹쳐지며 작성되어져 있다.(강조 번역자) 한국은 어떤 때에는 일제의 지배에서 1945년에 해방된 국가이며, 어떤 때에는 북조선의 침략에서 1953년에 해방된 국가이며, 어떤 때에는 군인들의 압정으로부터 1987년에 해방된 국가이다. 그 각자의 '우리들'이 다른 자화상을 가지며, 다른 적의 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쁜 장소'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격의 분열도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이중인격자라고 한다면, 한국은 3중인격자이다. (강조 번역자) 그것은 아마도, 근대 일본에 있어서는 커다란 외상이 하나(패전)인 것에 대해, 근대 한국에 있어서는 두 개 있었다(식민지화와 조선전쟁)는 것에 대응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분열은 혹시 다른 나라에서도 관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 칸트는 국제관계론을 구상할 당시, 국가를 가진 민족은 하나의 인격이라 보아도 된다고 썼다. 그렇지만 그러한 전제는 유럽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세계는 외상을 입은 국가가 많으며, 실제로 우리들의 나라 주변에는 다중인격 국가(이것은 다민족 국가와는 다르다) 뿐이며, 그러므로 외교든 뭐든 잘 될 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시아 전체가 '나쁜 장소'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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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ron 3>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

2016/08/09 22:34

트윈 테일의 천사 – (9)~(14) 完 번역

9.


「끝나지 않는 일상」의 끝에서, 우리는 천사에 닿는다. 그것은 캐릭터에게 「모에」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확인했듯이, 애초 캐릭터 모에란 「카피에 아우라를 머물게」 하는 역설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주체에 의한 동물적 욕구와 인간적 욕망의 해리적인 공존이며,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로 구성된 이층 구조였다. 이 둘 사이를 왕복하며 우리는 「큰 이야기」를 잃어버린 후의 「끝나지 않는 일상」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끝나지 않는 일상」이 분단되어 확률적인 「끝」의 예감에 침식되었을 때, 캐릭터의 우리와의 관계 또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 간의 왕복 운동이 정지하고 캐릭터 모에가 기능 부전에 빠진 순간. 우리는 시뮬라크르에 몰입하는 것도, 혹은 분해하여 데이터베이스로 환원하지도 못하고, 과거 감정 이입의 대상이었던 것의 단편들이 산란하는 광경을 그저 망연자실 보고 있다. 이제 그것들에 모에할 수 없다, 더군다나 사랑한다니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비극은 없다 - 오히려 그것이 비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로서 우리가 「천사에 닿을」 가능성이 열린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사」란, 지금 이순간 「편재하는 캐릭터」의 별명이다.


우리는 아즈냥의 피규어나 일러스트, 2차 창작과 같은 것에 대해 아즈냥의 존재를 인정하고, 동물적 쾌락을 요구하며 감정 이입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냥 피규어」, 「그냥 일러스트」일 뿐이며, 요컨대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즈냥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적 욕구와 인간적 욕망을 절단함으로써 그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아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말해보면, 우리가 캐릭터를 억지로 「의인화」하여, 마치 같은 「인간」인 것처럼 수용해왔다는 이야기이다. 그 뿐인가, 존재하지 않을 터인 「연인」 대신으로서 의사적인 「연인들의 공동체」를 가장해온 것은 아닐까?


「아즈냥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아」 라든가 「그것은 단지 그림에 불과하다」라고 시치미를 뗄 때 조차 우린 인간적인 사랑의 (불)가능성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다. 캐릭터라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를 인간이라는 좁은 틀에 감금하고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실패해 버린다. - 아야나미 레이의 「내가 죽어도 대체품은 있으니까요」라는 말에 우물거리는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이카리 신지처럼). 인간과 달리 캐릭터에는 별다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즈 A의 지적처럼, 예를 들어 "아야나미 레이로 불리는 것이 다수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아야나미 레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역으로 전부 아야나미 레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59]


확실히 「카피에 아우라를 머무르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캐릭터 모에는, 캐릭터가 인간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은폐하여, 우리가 사랑의 불가능성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에서 파산하고 만다. 「상실의 상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러한 「끝」 속에서야말로, 희미한 「구제」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케이온!!』의 최종화가 우리에게 일러준 것은, 아야나미의 비극적인 – 그러나 어째서 비극적일까, 그것은 오히려 우리 쪽에서의 시각에 불과하다- 대사에 대한 하나의 답이며, 캐릭터의 탈인간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아즈냥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화면의 안과 밖을 막론하고 그녀는 도처에 존재한다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요컨대 모든 피규어, 모든 일러스트가 아즈냥의 귀중한 단편인 것으로, 프랙탈로 편재하는 그녀의 일부인 것이다. 아즈냥이 「천사」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이토 타마키가 「동일성을 전달하는 것」라고 정의했고[60], 이토 고가 "캐라"라고 불렀던 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61] 혹은 「고유명」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참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62].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천사」라는 신비주의적인 어휘에 구애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캐릭터가 「캐라」인지 「고유명」인지 「동일성을 전달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문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캐릭터를 인간으로 왜소화하는 일 없이, 비인간적인 존재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모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도」 –두드러지게 종교적인 경험-에 가깝다. 편재하는 캐릭터의 눈빛을 직관하고 우리가 스스로의 유한성을 향해, 불가피한 「끝」으로 돌려보내어지는 한에서, 아마도 그렇다.


「동일성을 전달하는 것」이라든지, 「캐라」 등의 비교적 중립적인 어휘는 분석을 위한 개념장치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천사」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닿는」 경험에 있어서, 즉 스스로의 절대적인 유한성으로 돌려보내어지는 순간에 있어서, 우리들의 「끝」을 윤곽짓는 「영원」으로서 산출된다[63]. 그러므로 접촉의 은유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몰입이나, 주체/객체가 미분화된 상태로의 퇴행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가 노정되는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연인과 맞닿아, 서로의 「끝」을 나누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 우리의 막연한 삶을 경계 짓고, 그것에 의해서 「끝」의 건너편을 향해 절단하면서 매개하는 프릴 같은 것 -그것이 천사이다.


「끝」의 예감에 사로잡힌 우울한 눈빛만이, 캐릭터를 인간화하는 일 없이 보편적인 존재자로서 직관할 수 있도록 한다. 편재하는 천사의 거대한 눈을 경유하여, 우리는 스스로의 「끝」으로 반송당한다. 「천사에 닿는」 것이란 그런 경험의 직유直喩인 것이다.

 

10.


동그랗게 도려진 아즈냥의 얼굴 사진이, 1기 『케이온!』의 집합 사진이 상징하는 「끝나지 않는 일상」을 전제로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처음부터 이중화되어 있었다는 것, 편재하는 천사에 의해 지켜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편화되고 중첩된 아즈냥의 이미지는, 피할 수 없는 「끝」을 「영원한 방과후」로 반전시키는 「구제」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가 아니다. 단순한 감정 이입의 대상도, 소통을 위한 소재도 아니다. 그것은 구제의 우의寓意이고, 영원의 애너그램이며, 천사의 옆모습이 숨겨진 수수께끼 그림이었던 것이다. 동물적인 몰입이 아닌, 번뜩이는 해독의 대상으로서 있는 것. 우리는 그것을 「알레고리[=우의]」라고 부르기로 한다.


알레고리란 무엇일까. 『미학 사전』에 따르면, 「보편」과 「특수」의 절대적인 일치가 「상징」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알레고리는 「특수」가 「보편」을 의미하거나 「보편」이 「특수」를 통해 직관되어지는 표현이다[64]. 유명한 예로서, 칼과 천칭을 든 여성상에서 「정의」의 개념을, 여우에게서 「교활」을 표현하는 사례 등이 꼽힌다. 이것들은 관습과 약속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으며, 두 사람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상징이란 예를 들어 신의 동상이 (어떤 개념으로 회수 불가능한) 신 그 자체로서 출현하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단순한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알레고리로서 경험한다는 것은, 「특수한 것」으로서의 다양한 단편들을 통해서, 그 자체 구원과도 같은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캐릭터를 직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여러 캐릭터 굿즈, 2차 창작을 시뮬라크르로서 -즉 캐릭터 모에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그러기는커녕 정반대의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몇번이나 말했듯이 캐릭터 모에가 「카피에 아우라를 머물게 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해 알레고리적인 경험이란 「유기적인 것, 생명 있는 것의 파괴 -가상[=아우라]의 소거」에 의해 특징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66]. 그것은 즉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육체]에, 부자유함, 미완성성, 그리고 단편성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66].


알레고리적 경험의 내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1928년에 간행된 『독일 비극의 근원』에서, 상징과 대비되는 알레고리가 가진 파괴적, 단편적인 성질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예술 상징, 즉 유기적인 총체성을 가진 상으로서의 조형적 상징에 대해서, 알레고리적 문자상의 이 무정형인 단편만큼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없다"[67]. 혹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사물적인 우위, 총체적인 것에 대한 단편의 우위에 의해서, 알레고리는 상징과 대극을 이루고, 또한 바로 그것 때문에 동등할 정도로 강력한 것으로서, 상징에 대항한다."[68]. 인간적, 유기적인 총체성(상징)에 대한 사물적, 무기적인 단편성(알레고리)의 우월. 캐릭터 모에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산란된 무수한 단편으로 변용시키는 것. 무너진 피규어는 사지에 결손을 품고, 산산조각나 떨어진 일러스트는 중요한 부분이 파괴되어 있다. 아즈냥의 얼굴은 배려없이 잘라내어져, 다른 사진 위에 간단하게 붙여진다. 그것은 벤야민의 말로는 "짜집기 세공으로서의 알레고리적 형성물"이 아니면 무엇일까? [69].


알레고리적 직관 앞에서, 시뮬라크르가 꾸미는 "총체성이라는 거짓의 가상은 사라지"고 만다. [70] 캐릭터 모에의 아우라는 부서지겠지만, 그럼으로서 우리는 그 후에 남겨진 단편들 속에서, 아우라를 잃고 「고갈된 수수께끼 그림」 속에서, 본래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다. "알레고리의 품 속에서, 사물은 스스로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이 되고, 그에 의해 알레고리는 그 사물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71]. 우리는 우울한 「알레고리」로서 『케이온!!』 최종화에 대해서 말했다. 「영원한 방과후」에 대해서, 천사의 구제에 대해서 말했다. 유이가 아즈냥에게 선물한 멀티 레이어 합성 사진은 「끝」을 예감하는 그녀의,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시선 아래에서 영원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로 변용된다.


그러나 「무정형의 단편」이 알레고리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란, 오히려 영원이나 구제와 대조적으로 언젠가는 모든 것이 멸해진다는 「덧없음」인 것이고, 불가피한 「끝」인 것은 아닐까. 그것은 단편이 산란하는 「폐허」의 광경이다. "사물의 세계에서 폐허인 것, 그것이 사고의 세계에 있어서의 알레고리임에 틀림 없다"라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72]. 하지만 그런 폐허 속에서야말로, 영원과 구제를 가져오는 「기적」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서 부숴져 흩어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파편, 단편이다. 그것은 바로크에 있어서 창작의 가장 고귀한 소재이다. 왜냐하면, 목표를 정확히 떠올리지 못한 채로 오로지 단편을 쌓아 나가는 것, 기적을 끊임없이 대망하며 반복을 고조해 가는 것은 다양한 바로크 문학 작품에서 공통되는 점이기 때문이다. 바로크의 문사들은 예술 작품을 이 의미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바로크 시인들의 시도는 연금술의 달인들의 손 놀림에 비슷하다. 고전 고대가 남긴 것은 그들에게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전체를 조합하기 위한, 아니 건축하기 위한 기본 물질이었던 것이다. 즉 이 새로운 것의 완벽한 환영이, 폐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73]


벤야민이 17세기의 독일 바로크 비극에서 찾아낸 것을, 우리는 현대의 오타쿠 문화에서 발견 할 수 있을까. 그는 「아이의 방」과 「망령의 방」, 그리고 「마법사의 방이나 연금술사의 실험실의 단편적인 것, 무질서한 것, 쌓여진 것」에서, 알레고리와의 깊은 연관성을 찾고 있었다[74]. 우리는 그곳에 난장판인 오타쿠의 방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시뮬라크르의 끝나지 않는 미끄러짐에 떠밀려 내려가고, 무수한 피규어, 일러스트나 2차 창작에 파묻힌 방 안에서 우리는 고독한 「끝」의 예감에 침식된다. 시뮬라크르를 뒤덮은 가상의 빛이 사라지고, 비인간적, 무기적인 단편으로 모습을 바꾼다. "매우 의미 있는 파편, 단편"이 흩어져 폐허에 머무르며, 단지 잡동사니를 쌓아가며 "기적을 끊임없이 대망하고 반복을 고조해 가는 것"̶̶ 그것은 다가오는 구제의 전조에 이끌리면서, 우리의 일상을 확장하려는 연금술적인 프로세스이다.


이윽고 방문할 「끝」에서, 우리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산란하는 무수한 단편이 하나의 상을 맺는 것을 볼 것이다. 방대한 캐릭터 굿즈, 2차 창작의 잔해 더미는 마지막 순간에 「부활의 알레고리」로 반전되기 때문이다. "그 위로할 것 없는 혼란스런 광경 속에서, 덧없음이 의미되고, 알레고리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덧없음 자체'가 의미되는 것이며, [부활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로서 제시되고 있다"[75]. 시뮬라크르의 잔해가 흩어진 파국적인 광경은, 이렇게 「배신적으로 부활로 돌아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캐릭터 모에에 특화되어, 엄청난 숫자의 시뮬라크르를 통해서 「끝나지 않는 일상」을 이중화하는 공기계 애니메이션의 전략은 이제 「끝」에 있어서의 알레고리적 부활로의 준비 단계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방과 후의 온화한 빛에 비추어져, 시뮬라크르의 아우라가 탈락하고, 단편적인 알레고리로 변용된다. 트윈 테일의 긴 그림자가 어디까지나 늘어난다. 그저 그럼으로서 우리들은, 단편 속에 편재하는 캐릭터를 직관한다 – 즉 「천사에 닿는」 것이다. "신의 세계에서, 알레고리는 눈을 떴다."고 벤야민은 썼다. [76]


11.

    

현대의 오타쿠 문화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부활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도들은, 그것이 외부와 만나는 지점에서, 즉 캐릭터에 대한 동물적인 감정 이입이 저해되는 영역에서 보다 뚜렷한 윤곽선을 동반하며 나타난다. 그것들은 자주 캐릭터 모에의 불가능성에서 유래하는 강렬한 위화감으로서 경험되며, 때로는 심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현대 아트 집단 「카오스*라운지」의 핵심 멤버의 하나이며, 일련의 소동의 발단이 된 우메라보梅ラボ (梅沢和木)의 평면 작품은, 3인조 아트 유닛 「three」의 조각 작품과 함께 알레고리적 경험을 정착시키려는 훌륭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회화와 조각이라는 표현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양자의 수법은 매우 비슷하다. 우메라보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캐릭터의 화상을 조각조각 분해하고, 이들 조각을 콜라주함으로써 부정형이고 무의미한 이미지의 집적을 생성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그림 6). 한편 three는 이와 비슷하게, 대량의 미소녀 피규어를 분해하고 이들 조각을 녹인 후 압축함으로써 여러 형태를 본뜬 입체물을 만든다(그림 7).


<그림 6>

<그림 7>


 우메라보가 이미지의 반자동적인 생성 –인터넷이라는 「아키텍처의 생성력」[77]을 강조하며 작가가 개입한 흔적을 가능한 한 삭제하려는 반면, three는 더 컨셉추얼하고 세련된 접근을 지향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양자의 뚜렷한 공통점이다.

이 아티스트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미소녀 캐릭터의 피규어나 일러스트와 같은 시뮬라크르를 가차 없이 해체하고, 자신들의 작품을 구성하는 「단편」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의 인용 부분에서 「바로크 시인들」에 대해 벤야민이 말하고 있었던 것처럼, 현대의 오타쿠 문화가 만들어내던 각종 시뮬라크르는 이제 "그들에게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전체를 조합하기 위한, 아니 건축하기 위한 기본 물질인 것이다". 즉 한쪽은 콜라주된 잡다한 이미지의 집적으로, 다른 한편은 압축된 추상적인 오브제로서, 시뮬라크르의 인간적, 유기적인 총체성을 파괴하고 단편적, 무기적인 알레고리로 변용시키는 것. 그렇게 그들은 시뮬라크르에 맺힌 캐릭터 모에의 아우라를 폭력적으로 박탈한다.

그러므로 적지 않은 오타쿠들이 우메라보, 혹은 three의 작품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 고 까지는 말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들이 잊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끼는 건 이른바 「현대 아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캐릭터 모에로 회피해 왔던 물음에, 사랑(의 불가능성)을 둘러싼 문제에 다시 대면해야 한다고 추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번이나 말했듯, 우리들은 동물적 욕구와 인간적 욕망을 절단하여, 각각 다른 수준에서 처리하는 것으로서 "카피에 아우라를 머물게 하는" 역설을 가능하게 해 왔다. 그러나 우메라보와 three의 작품을 앞에 두었을 때, 우리들은 자신들의 해리적인 행동에 무자각적일 수 없게 된다. 뿔뿔이 분해·압축되어 사람의 형태를 남기지 않은 일러스트나 피규어의 단편은 이제 동물적인 몰입의 대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꿈이었던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분해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우메라보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쓰고 있듯, 원래 캐릭터란 "익명의 상상력에 의해서 무한히 n차 창작되고 증식되며, 개변되고 편재하는 유령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78].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음에 드는 캐릭터의 「슬픈 말로」를 거기에서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어딘가 진심으로 화가 나거나 슬퍼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불편함의 정체는 사랑하는 것을 잃은 「상실」의 슬픔 등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즉 이 비어있는 슬픔은, 캐릭터 모에가 강제로 취소된 것에 의해서, 사랑한다는 것의 불가능성 – 즉 「상실의 상실」- 이 노정된 것에 유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작품은 우리가 캐릭터에 모에한다는 것의 자명성을 되묻고, 그 암묵의 전제를 흔든다. 아야나미의 물음 앞에 멈춰서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마 우메라보에게는 -그리고 물론 three또한- 오타쿠의 해리적인 삶의 방식을 비난하며 캐릭터를 떨어뜨리려 하는 노악적인 의도는 없었던 것임에 틀림 없다. 오히려 거기까지 읽어 들인다면 그것은 우리의 꺼림칙함이 나타난 결과이거나, 혹은 불행한 엇갈림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79] 그런 의도보다도, 그들은 시각적인 새로움과 재미, 혹은 기분 나쁨을 통해, 우리에게 생각하는 것을 촉구하는 듯 하다. 캐릭터는 무엇인지, 캐릭터 모에는 어떤 것인지 - 캐릭터 모에의 끝나지 않는 왕복 운동을 일시 정지하지 않고서는 그런 물음과 마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 캐릭터 모에가 파탄나는 지점에서, 즉 「끝나지 않는 일상」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꼼짝없이 이 물음 앞에 끌려간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 묻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분해된 시뮬라크르는 데이터베이스로 환원되는 일 없이, 이제 무수한 단편으로서 우리 주변에 흩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제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우메라보나 three의 작품은 우리의 어두운 욕구를 강한 빛으로 비추고 그렇게 그저 반성하기를, 「덧없음」을 암시하는 폐허 속에 움츠러져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다. 쓰레기 더미로 변한 시뮬라크르의 잔해는 마침내 방문하는 「끝」의 광경 자체이다. 우리는 기적의 도래를 기다리며, 산란된 무수한 단편을 오로지 쌓아올려 간다. 오후의 온화한 빛을 받고 쌓인 단편이 하나의 그림자를 만들고 -부활을 암시하는 여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12.

<그림 8>

「끝나지 않는 일상」이 중단된 그 날, 우메라보는 그 날을 경계로 하여, 자신의 표현 스타일을 크게 바꾸고 있다. 대량의 단편들이 합성된 무의미한 이미지의 집적에서, 사람의 모습을 한 캐릭터를 화면의 중앙에 배치한 종교적 의미가 강한 구도로의 전환(그림 8). 마치 하늘에서 강림하듯 그려진 캐릭터에는 「구제와 천벌의 여신」이라는 매우 우의적인 역할이 주어지고 있다(그림 9).
 

<그림 9>

「키메코나쨩」이라는 친밀한 애칭이 붙은 이 캐릭터는, 『러키☆스타』의 주인공인 코나타 이즈미를 바탕으로 다양한 캐릭터의 특징을 짜깁기한, 말 그대로 「키메라」적으로 합성되어 만들어진 존재이다(그림 10). 키메코나쨩은 익명 화상 게시판인 「후타바 ☆ 채널」에서 탄생하여, 마찬가지로 해외의 화상 게시판 「4chan」에 전재되며 인기를 누린 뒤 (4chan에서는 "Moetron"이라고 불린다) 다시 후타바 ☆ 채널에 역수입되어 사랑받아 왔다. [80] 아마 우메라보는 그 자체로서 합성의 산물인 –이라고 해도 각각의 일러스트에는 그것을 그린 그림쟁이들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창작 기법과 닮은 것을 찾아 내, 신작의 주요 모티브로 채용할 것을 정했을 것이다. 그는 블로그에서 키메코나쨩이 "그저 무명의 창작 의욕들이 확산, 집합한 결과 생겨난" 캐릭터인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작품 또한 「익명적 집합지의 성과물」임을 강조하고 있다[81].
 

<그림 10>

그러나 우메라보 자신이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이상 여기에는 분명한 모순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비록 우메라보의 말처럼 익명의 이용자에 의해 지탱된 인터넷의 생성력이야말로 키메코나쨩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 아티스트 자신이 하나의 "아키텍처"라는 것은 수사에 불과하다[82]. 마르셀 뒤샹의 『샘』를 예로 들 것도 없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메라보의 이름에 의해, 즉 강한 작가성을 띤 작품으로서 유통되기 때문이다. 이 비대칭성에 무자각적일 수 있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의 작품은 인터넷에서의 무상의 표현에 대한, 아트 측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수탈」과 「착취」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아키텍처의 생성력」은 공허한 책임 회피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키메코나쨩의 귀속과 상업적인 이용을 놓고, 후타바 ☆ 채널의 거주자와 카오스*라운지 측의 대립이 표면화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흐름이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양자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다 이윽고 불신감이 격발된 익명 게시판의 주민들은 카오스*라운지의 활동에 대한 각종 의혹을 추궁, 고발한다. 자세한 경위는 생략하지만 우메라보 작품의 저작권 침해 문제와 「파멸*라운지」의 위폐 의혹을 시작으로 최종적으로는 대형 일러스트 커뮤니케이션 사이트 「pixiv」를 끌어들인 대소동으로 발전하게 된다[83].

카오스*라운지 소동의 전말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제쳐놓자. 오히려 여기서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저작권 침해의 여부를 논쟁에 숨어 완전히 그림자가 옅어져 버린 사항 -즉 우메라보의 작풍이 극적으로 변화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이다.

우메라보는 소동의 계기가 된 작품이 "지금까지의 자신의 작품과 비교해 상당히 불규칙적"임을 인정하고 있다[84]. 그것은 "지진 후의 캐릭터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일관된 생각을 나타낸"다는 -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명확한 의도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해지를 찾은 우메라보는 그곳에서 본 "자갈과 모래에 젖어버린 많은 인형"에 충격을 받고, 비록"편재하는 유령 같은 것"에 불과한 캐릭터라도 "어떤 형태를 취하면 사람에게 중시되고 둘도 없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85].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우메라보는 그동안의 알레고리적 수법을 버리고 시뮬라크르에 맺힌 인간적인 아우라의 복권을 향해 180도 「전향転向」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작품에 그려져 있는 것은 긴 세월을 지나 「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시뮬라크르의 「상실」을 개탄하고, 마치 그것이 인간인 양 추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메라보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임해 온 것은 인간과 캐릭터를 나누는 본질적인 차이이며,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는 시뮬라크르에 머물었던 캐릭터 모에의 아우라를 해체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고 있는 작품 또한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메라보가 사람의 모습을 한 이미지를 고집한 것은, 캐릭터를 의인화하고 그 「둘도 없음」을 로맨틱하게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키메코나쨩이 「구제와 천벌」의 우의로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도 분명하다. 「구제」인 동시에 「천벌」이기도 한, 인지를 초월한 일격 - 그것이 이 작품의 중심적 테마이며, 거기에 인간적인 감상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 작품은 쓰나미의 이미지, 잔해들의 이미지와, 현지에서 스스로의 눈으로 본 봉제 인형과, 인터넷에 널려있는 무수한 화상들을 뒤죽박죽 섞어 전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일상이었던 캐릭터들과, 버려진 캐릭터들이 함께 뒤섞여 땅바닥에 흐르는 구성입니다.

그리고 하늘 한 가운데, 한 캐릭터가 마치 여신처럼 땅에 버려진 자들을 구제하듯이 강림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여신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관점을 반전시키면 이 땅의 참상이 모두 여신이 천벌을 일으킨 결과처럼도 보이죠.[86]"

우메라보가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그곳에서 알레고리적 부활을 암시하는 양의적인 비젼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는 「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캐릭터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야말로, 「구제와 천벌의 여신」을 소환할 필요가 있었다. 즉 이 작품에서는, 버려진 둘도 없는 시뮬라크르를 위무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적인 고유성」의 획득에 의해서 은폐된 것, 즉 「유령적인 편재성」의 폭력적인 회복이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망가진 시뮬라크르에 탄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본래 있어야 할 모습 -편재하는 캐릭터를 암시하는 단편- 으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에서 인간적인 고유성의 아우라를 박탈하고(천벌), 그것에 의해 본래의 유령적 편재성을 되찾아 주는 것(구제). 우메라보가 말하듯 「구제와 천벌의 여신」이란, 캐릭터를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정화하는, 그러한 신적인 폭력의 현현이다. 무수한 단편으로 해체된 시뮬라크르의 잔해는 소유자의 기억이나 감상의 굴레를 뛰어넘어 편재하는 캐릭터의 일부로서 새로 태어난다. 이제 키메코나쨩이 「여신」으로 뽑힌 이유는 분명하다. 즉 그 자체 합성의 산물인 키메코나쨩은, 버려진 시뮬라크르를 알레고리적 단편으로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녀 자신이 「부활」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로 강림하는 것이다.

이전의 우메라보의 작품이 단편적인 이미지의 집적을 제시함으로써 캐릭터 모에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인간적인 사랑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것이었다면 키메코나쨩을 그린 작품은 -모티브의 선택이 법적, 도의적으로도 적절했는지는 다른 이야기지만- 파괴와 동시에 구제를 함의한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폐허 속에 버려두지 않고, 최후의 날의 알레고리적 부활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천사에 닿는」 경험을 도해하고 있는 것이다.


13.

<그림 11>

우메라보는 지진을 계기로, 단편적이고 무기질적인 콜라주 작품에서 보다 메시지성이 강한 작품으로 자신의 작풍을 심화시켰다. 캔버스의 중앙에 배치된 키메코나쨩은 버려진 시뮬라크르를 파괴하면서 구제하는 부활의 알레고리로서 출현한다. 이에 대해 three의 몇몇 작품은 이미 우메라보의 시도를 선점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스타일은 무수한 미소녀 피규어를 용해, 압축하고 다양한 형태로 성형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커다란 미소녀 캐릭터의 모습을 본뜬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림 11).

three의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바라보면, 수를 셀 수조차 없는 피규어들의 얼굴이나 어깨, 다리, 가슴과 엉덩이가 표면을 빽빽이 덮은 이상한 광경을 만들어 내고는 있지만 동시에 매우 깨끗하고 세련된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아마 카오스*라운지의 아마추어적인 전시 기법과 대조적으로 그들이 현대 미술의 문맥을 비교적 깍듯이 참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87]. 특히 지진 후(2011.08.6~28)에 「tokyo wonder site本郷」 에서 발표된 설치작품 「24bit」는 , 우메라보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알레고리적 부활의 가능성을 구현화하려 한 획기적인 시도였다[88].


<그림 12>

여기에서는, 종전처럼 대량의 미소녀 피규어들의 단편을 용해, 압축하는 것이 아니라, 피규어를 하나씩(아마 전용의 틀에 넣어) 압축하여서 손 한 가운데 얹혀질 만큼의 작은 직육면체 형태로 전시한다는 방법이 채용되고 있었다. 과거 사람의 생김새를 했을 터였던 무기질 큐브가 마치 묘비처럼 정연히 줄지어 서, 피부색과 원색의 섞인 복잡한 마블 무늬를 드러내고 있다(그림 12). 직방체의 윗면에 남겨진 큰 「눈」이 미소녀 피규어였던 때의 모습을 간신히 추모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다. 규칙적으로 배치된 각각의 받침대에는 압축된 피규어의 이름과 중량이 적혀져 있고, 네모난 큐브로부터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캐릭터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그림 13)

<그림 13>

여기에서 three의 설치작품은,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 간의 왕복 운동을 중단하고, 캐릭터의 편재를 암시하는 「부활의 알레고리」로서 나타난다. 압축되기 전의 미소녀 피규어의 그림자가 방과후의 빛에 비추어져 길게 늘어난다. 사람의 모습을 잃고 이제는 동물적인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선명한 묘비는, 그러나 스스로 단편으로 화함으로서, 특수에서 보편에 이르는 알레고리적 통로를 열어 젖힌다. 우리는 받침대에 새겨진 이름을 수단으로 삼고, 명확한 실체를 갖지 않는 -그러므로 도처에 존재하는- 그림자로서의 캐릭터를 직관하도록 촉구당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메라보가 묘사했던 캐릭터의 「유령적 편재성」과 같은 것이 보다 추상적이고 세련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즉 무기질 직육면체로 바뀐 미소녀 피규어는, 오히려 그것에 의해 캐릭터 본래의 편재성을 회복하고 파악하기 힘든 그림자로서 부활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three의 작품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림자와 함께 거대한 눈의 이미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아즈마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캐릭터에 있어서 「시선을 교차시키지 않는 눈의 기능」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다[89]. 일반적으로 투시도법적인 서양 회화의 경우, 우리는 그려진 인물상을 바라보고, 시선을 나눔으로써 리얼리티를 느낀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데포르메된 기호적인 눈은 눈빛을 교환하지 않고도 감정 이입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캐릭터의 눈을 바라보며 그리고 분명히 감정 이입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눈이 마주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령적」인 시선에 리얼리티를 느끼고, 아우라를 머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동물적 욕구와 인간적 욕망을 해리적으로 공존시키는 포스트모던적 주체다. 전자를 후자에서 분리하고, 시뮬라크르의 차원에서 처리한다는 오타쿠의 행동은 캐릭터의 「「보는」 측과 「보여지는」 측의 공간적인 연속성을 탈구시키는 기묘한 시선」에 의해 담보되어지고 있다[90]. 즉 캐릭터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때문에야말로 우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동물적 쾌락을 일방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91].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캐릭터 모에의 왕복 운동이 정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캐릭터의 시선이 전경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시뮬라크르가 시뮬라크르인 것을 그만둔 그 순간, 무언가를 반사할 일 없던 캐릭터의 유령적인 눈이 갑자기 알레고리의 어두운 빛을 띤다. 우리는 변함없이 캐릭터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할지라도, 잔해 속에 산란되어진 무수한 눈의 배후에 편재하는 무언가의 시선을 감지한다.

사이토는 아즈마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캐릭터를 보고 있지만, 캐릭터 또한 우리들을 보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촉구했다[92]. 사이토에 의하면 "그것은 반드시 「눈이 마주치는」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93] 혹은 쿠로세도, 예를들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캐릭터에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94]. 어쨌든 그들은 시뮬라크르에 대한 동물적인 감정 이입과는 다른 경험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캐릭터를 그 편재성에 의해 직관하는 것이며, 흩어진 단편들의 한편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시선에 몸을 드러내는 것이다. 캐릭터와 일대일로 시선을 주고받지 못하는 것은, 그녀들이 곳곳에서부터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즈냥 카메라가 그렇듯이.

그렇다면 three가 압축된 직방체에 미소녀 피규어의 눈만 새긴 것은 그것이 캐릭터의 편재를 암시하는 특권적 알레고리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커뮤니케이션의 수근거림이 멀어지고, 고독한 「끝」의 예감 속에서 우리는 곳곳에서 보여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의 시선이 되진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천사에 닿는다」는 접촉의 은유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캐릭터와의 일체화도, 차이의 소멸도 아니고 스스로의 절대적인 유한성으로 돌려보내지는 일이니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우리는 천사의 눈길을 경유하여 각각의 「끝」을 맞는다.


14.


우리는 「끝나지 않는 일상」의 끝에서 출발했다. 망연자실한 채 공기계 애니메이션을 돌아보고, 『케이온!!』 마지막 회에서 천사가 방문하는 것을 목격했다. 시뮬라크르의 잔해가 흩어진 폐허 속에서, 벤야민은 알레고리적 부활의 가능성을 믿었다. 우메라보와 three의 작품을 앞에 두고 「천사에 닿는다」는 경험의 확실한 흔적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마치 무라카미가 『Kanon』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종교적인 구원의 욕망에 지탱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95].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확률적인 「끝」을 의미짓는 것이다. 초월적인 것의 부재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 미끄러짐의 황홀함에 몸을 맡기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 날에 있어서의 기적의 도래를 예감하고 기도하는 것. 이제는 죽음의 신의 은총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알레고리화한 무수한 단편을 통해서, 편재하는 천사의 눈길을 직관할 수 있다.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의,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이른바 「루이즈 필수요소 ルイズコピペ」로 불리는 작자 미상의 텍스트에는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혹은 앞으로 더듬어 갈 영혼의 편력이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본고의 「끝」을 장식할만한 명문이다. 전문을 인용해 본다.


루이즈! 루이즈! 루이즈! 루이즈으으으으으으으으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아아… 앗앗-! 아-아아아아아아!!! 루이즈루이즈루이즈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

아아 킁가킁가! 킁가킁가! 스-하-스-하-! 스-하-스-하! 좋은 냄새구나...킁킁

-하아앗! 루이즈 프랑소와즈땅의 분홍색 블론드 머리를 킁가킁가하고싶어! 킁가킁가! 아-아!!

아냐! 쓰다듬고싶은거야! 쓰담쓰담! 쓰담쓰담! 머리카락쓰담쓰담! 낼름낼름쓰담쓰담... 큥큥 큐이!!

소설 11권의 루이즈땅 귀여웠어어!! 아-- 아아…아아아…앗아아아아아!! 후아아아아아아앙ㅅ!!

아니메 2기 방송됐다니 잘됐네 루이즈땅! 아아아아아아! 귀여워! 루이즈땅! 귀여웟! 앗아아아아아!

만화 2권도 출간되어서 기ㅃ...이야아아아아아아아!!! 니야아아아아아아아앙!! 갸아아아아아아아!!

구아아아아아아아아!!! 만화 같은건 현실이 아니야!!!! 아...소설도 애니도 잘 생각해보면…

루 이 즈 쨩 은 현실 이 아 냐? 냐아아아아아아아앙!!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럴리가ㅏ아아아아아앙!!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하아아아아아아아앙!! 하르게기니아아아아아!!

이런! 칙쇼-! 그만둘거야!! 현실 따위 그만….둬...에!?... 보…고 있어? 표지 그림의 루이즈쨩이 나를 보고 있어?

표지 그림의 루이즈쨩이 나를 보고 있어! 루이즈쨩이 나를 보고 있다고! 삽화의 루이즈쨩이 나를 보고 있어!!

아니메의 루이즈쨩이 나에게 말하고 있어!!! 다행이야… 세상 아직 버릴만한게 아니구나!

이얏호오오오오오오오!!! 나에겐 루이즈쨩이 있어!! 해냈다고 케티!! 혼자서도 할 수 있는걸!!!

아, 만화의 루이즈쨔아아아아아아앙!!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앗아앙앗아앙아아안니이임!! 세, 세이버!! 샤나아아아아아아아!!! 빌헬미나아아아아!!

우웃우우우우!! 내 마음아 루이즈에게 닿아라! ! 하르게기니아의 루이즈에게 닿아라!! [96]
 

이처럼 감동적인 "카피페"가 또 있을까[97]. 그것은 이미 기분 나쁘다거나, 맛이 갔다거나 그런 감정을 모두 재쳐두고, 인간적인 사랑의 형태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인기 라이트 노벨 『제로의 사역마』의 여주인공인 루이스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에게 바쳐진 이 너무나도 유명한 텍스트는 「끝」의 고뇌를 뚫고 환희에 이르는 – 즉 「천사에 닿는」- 경험을 장대한 서사시에 못지않게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신곡』이라 부를 만하다.

전 18줄로 구성된 루이즈 카피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선 일련의 "루이즈! 루이즈! 루이즈! "에서 7번째 줄 "귀여웠어어!! 아-- 아아…아아아…앗아아아아아!!" 까지가 캐릭터 모에의 황홀에 상당하고, 우리는 뜻대로 「루이즈땅」의 「분홍색 블론드 머리」를 「킁가킁가」하고 「스-하-스-하」 하고 「쓰담쓰담」한다. 이렇게 1부에서는 루이즈땅의 머리 냄새와 촉감과 같은 촉각적인 쾌락에 몰입하는 모습이 독특한 의음어·의태어를 가지고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것은 일종의 퇴행적인 경험인 만큼, 자타의 경계가 녹아 내리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 여덟번째 줄 "만화 2권도 출간되어서 기ㅃ..."부터 12줄 " 이런! 칙쇼-! 그만둘거야!! "에서는, 전환되어 캐릭터 모에의 기능 부전과 현실의 절망이 담긴다. 두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만화나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의 「루이즈쨩」 -여기서 「루이즈땅」에서 호칭이 변화하고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 "현실이 아닌" 것에 마음이 닿는다. 황홀한 신음이 공포의 비명으로 바뀌면서 서두부터 반복되는 "아아아아아아아"와 대량의 느낌표는 갑자기 절망을 띠기 시작한다.

12줄의 후반부 "현실 따위 그만….둬...에!?"에서 최종까지의 노도의 전개는 압권 그 자체이다. 비탄에 "현실은 그만두"어 버릴려는 그 때, "표지 그림의 루이즈쨩"이나 "삽화의 루이즈쨩", "아니메의 루이즈쨩", "만화의 루이즈쨩"이 곳곳에서 "나"를 「보는」 것을 깨닫고 (여기서 처음으로 주체를 지목하는 말僕이 등장하는데, 이는 「천사에 닿는」 경험을 통해서, 죽어가는 자로서의 자기 형성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뮬라크르로서의 "루이즈땅"은 편재하는 "루이즈쨩"의 일부와도 같은 단편으로 변모했으며, 부활의 알레고리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루이즈쨩은 -루이즈땅이 아닌-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즉 "나에게는 루이즈쨩이 있어!!"라고 단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캐릭터 모에의 왕복 운동을 중단하고 불가피한 「끝」을 맞아야만 했다. 그저 그렇게 하여, 우리는 편재하는 천사의 시선에 닿아, 자신의 환원 불가능한 유한성으로 반송된다. 진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걸!!!" 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의 상처 받은 영혼은 루이즈땅에 대한 「모에」(1부)에서 「끝」의 절망(2부)을 뚫고 3부를 마무리하는 최종 줄에서, 루이즈쨩을 향한 「기도」로서 결정結晶화한다. – "내 마음아 루이즈에게 닿아라! ! 하르게기니아의 루이즈에게 닿아라!!"

우리들은 그 동안 계속 일인칭 복수형으로 말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던 것이 아닌가. 고개를 숙이고 선 내 옆에는 언제나 남몰래 누군가가 -방과후의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내가 갑자기 죽음을 생각할 때, 그녀의 트윈 테일이 살며시 나에게 닿고 있었다. 그것은 한쪽은 영원을, 다른 한쪽은 끝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언젠가는 죽을 인간으로서 그녀에게 닿아, 이윽고 똑같이 죽음에 이를 사람들을 찾아냈다. 침묵이 지배하는 곳곳에, 그리고 물론, 작은 화면의 건너 편에서도.

그래서 나는 천사에게 기도한다. 죽어 가는 우리들에게 기도한다. 어떤 때라도 그녀가 우리들과 함께이기를 -바라건대 마지막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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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끝.

마지막에 좀 하츠네 미쿠의 MOON이 떠오르더라고요. 좋아하는 곡이라 그런지.

아, ㅅㅂ.... 주석 번역 완전히 잊어먹었다.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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