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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5 19:33

퀀텀 패밀리즈 감상 라노베

퀀텀 패밀리즈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나의 점수 : ★★★★




1) 야아! 카킷코 우는 소리좀 안나게 해라!

 이 소설을 읽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아즈마 히로키가 완전 key社의 작품들을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이었다.  아시후네 '유키토'는 AIR의 주인공 유키토과 이름이 같고, 후코, 나기사는 CLANNAD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고, 시오코는 CLANNAD의 우시오를 살짝 변형시킨 이름인듯 싶고, 리키는 리틀 버스터즈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다. 게다가 이 소설은 '가족' 이야기이다. 어딜봐도 key를 의식하고 있다고 볼수밖에(...) 

 책을 다 읽고 나서 처음엔 별반 감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이 소설은 본격 카킷코 신앙간증 소설 CLANNAD에 대한 오마쥬이며, 그의 사상서(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1,2)들과도 연속적인 관계에 있달까, 사상의 예시를 소설을 통해 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즉 책을 읽은 후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게임적 리얼리즘과 이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 대강 도식이 서 버렸기 때문에 뭔가 말하거나 쓴다는 것도 귀찮았다. 다만 거슬리는 요소가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임태훈씨의 평론이었고, 또 하나는 아즈마의 전작들(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시리즈)로는 설명하기 껄끄러운 '시오코'라는 존재였다.

 전자의 경우부터 일단 말하자면, 사실 난 임태훈씨의 평론을 읽고 상당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시오코라는 존재에 대해 중요하다고 그 스스로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소설에서의 설명 이상으로 독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실망스러웠고, 나중에 가서는 대충 "유행에 뒤지지 않는듯"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부분에선 그 무책임함에 좀 화가 났다. 또 유키토의 블로그 글에 대해 "헛소리"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는 매우 화가 났고, 퀀텀 패밀리즈에서의 캐릭터들을 데카르트주의적인 정신-신체의 대립으로 독해하면서 니체를 인용하며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그래도 난 글쓰는걸 사실 상당히 귀찮아하는 성격이고 (왠만한 모티베이션이 아니면 장문의 글은 잘 쓰지 않고 주로 트위터로만 씨부리는 편이다) 아마 이정도였다면 이 글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을 읽고 나서였다. 일반의지 2.0을 읽고 나서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일단 루소에 대해 그런 식의(일반의지를 그 자체로 '물질'로 보는) 독해를 시도한다는거 자체가 신선하기도 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서야 <시오코>라는 존재에 대해 아즈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유키토가 블로그에 썼던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투고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대강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뭐 두루뭉실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보겠다. 나는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이 소설을 독해할 것이다. 첫째로 아즈마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경유해서 임태훈씨의 신체-정신의 구분을 붕괴시킬 것이고, 둘째로 일반의지 2.0을 경유해서 '시오코'에 대해 말할 것이다.


2) 신체와 정신과 현실과 꿈과 캐릭터

 임태훈씨의 평론을 읽으면서 난 이 분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읽었지만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줄여서 탄생)>은 안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에서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탄생>을 예로 들어야할 부분에 그런게 없고 상대적으로 덜 연관되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쪽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그렇고. 이 사람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었다면 이런 식의 주장으로 글을 끝마치지는 못했거나, 적어도 한번쯤은 재고해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탄생>은 이미 임태훈식의 소박한 신체-정신론에 대한, 변주하면, 소박한 현실-캐릭터론에 대한 재고찰로서 쓰이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탄생>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는 것 중 하나는 오츠카 에이지의 캐릭터소설론인데,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로서 이야기되어지는 것은 "피를 흘리는 신체"를 그린다는 것의 모순이다. 오츠카 에이지는 만화, 애니메이션적인 기호적 표현이 어떻게 '신체'를, 그리고 '죽음'을 그릴 수 있는 것인지를 골몰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만약 소설창작가 A가 작품을 쓴다고 해 보자. 그는 작품을 쓰면서, 어떤 세계에서 어떤 캐릭터가 생활하는 것을 그릴 것이다. 이때 그 '생활'들 중,'죽음'이라거나 '피를 흘린다'거나 하는 어떤 압도적인 현실의 경험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는 그것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까? 그가 그린 것은 과연 현실과 충분히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yes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다. 소위 '순문학'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점은 쉽게 이해된다. 이런 글들은 꽤나 현실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꽤나 리얼하게 그리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소설들이 현실을 그리고 있으며, 현실에 대해 무언가를 던져준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근원에는 '투명한 문체'가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렸던 그것 말이다. 원근법적인 테크닉이라고 할까, 2D적인 것을 3D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원근법적 기술, 그것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서는 '투명한 문체'로 나타난다. 반면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는 '투명한 문체'따위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글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기호적으로 신체와 자연들이 표현된다. 그리고 근대의 여명 '근대문학'이 성립되면서 놓쳐버렸던 것, "우리가 현실을, 죽음을 그린다고 해도 정말로 그것을 그릴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다시금 던져진다. 오츠카 에이지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의 문제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해서도 다시금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임태훈씨 글의 문제점을 말하자면, 이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신체'가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신체'가 소설에서는 '그려질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정신 못지않게 신체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신체를 긍정해야 한다. (아마 기독교도나 골수 데카르트주의자가 아니라면 이런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어떻게 소설 안에서 신체를 그릴 것인가? 애초에 제대로 신체를 그릴 수 있어야만,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할 것 아닌가? 오츠카 에이지와 아즈마 히로키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오츠카는 결론적으로 캐릭터가 피를 흘리고 죽는다는, '신체성'을 어떻게든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오츠카는 기호적 표현으로는 신체를 그려낼 수 없다는 모순을 정면으로 보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극복에 구체적인 방법 따위는 없다. 단지 그 '모순'에 직면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그릴려고 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작업이 된다는 것이다. 여하튼 결론적으로는 오츠카는 신체를 그려야만 하고, 그것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연주의적 문학관을 답습하고 있으며, 임태훈씨의 주장과 결론적으로는 통하게 된다. (물론 문제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대단히 결정적인 차이이지만.)

 하지만 아즈마는 이렇게 말한다. 캐릭터는 굳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캐릭터는 게임 캐릭터여도 된다. 게임 캐릭터처럼 죽어도 플레이어 마음대로 다시 살아날 수 있고, 여러 세계를 탐험해도 된다. 캐릭터는 캐릭터로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펼쳐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퀀텀 패밀리즈 또한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만들고 있다. (정확히는 본론의 1부, 2부에서뿐이지만.) 이런 점은 자연주의적 문학관에서는 비판할 만할 점이다. 그렇다. 이를테면 임태훈씨의 주장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아즈마는 안이하게 신체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그는 '이야기 안'과 '이야기 밖'을 구분한다. (이 구분은 퀀텀 패밀리즈에서도 그대로 구현되었다.) 그리고 '이야기 안'에서는 캐릭터의 가능성(그것을 그는 이토 고를 인용하며 '캐라'라고 칭한다.)을 마음껏 펼치는 것이, '이야기 밖'의 플레이어(=독자)에게 오히려 현실과 신체를 압도적으로 '리얼'하게 느껴지게 만들 수 있는 테크닉을 연구한다. 이런 테크닉을 그는 <메타리얼픽션>이라고 부르며, 이런 예로 구체적으로는 쓰르라미 울적에, 올 유 니드 이즈 킬, ONE, AIR와 같은 key사 게임 등을 들고 있다.

 대충 풀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즈마가 신체를, 현실을 경시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런 것이 어디까지나 <이야기 안>에 대한 것이며, 이것을 확대하여, 예를들면 임태훈식으로, 아즈마가 신체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오독이라는 것이다. 아즈마가 본질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오츠카의 경우, 신체의 긍정, 현실의 긍정은 결국 <이야기 안>에서의 이야기로 끝나버리고 만다. 반면 <이야기 안>에서 신체를, 현실을, 캐릭터의 <캐라>로서의 가능성을 힘껏 펼침으로 인해, 오히려 <이야기 밖>의 독자의 신체성을, 하나뿐인 현실을 인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아즈마의 주장의 핵심이다. 퀀텀 패밀리즈는 목차 레벨에서부터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는데, 소설에서의 주된 이야기는 제1부, 제2부로 제시되며, 여기에서는 캐릭터들이 '캐라'로서의 가능성을 힘껏 펼쳐나간다. 그리고 소설의 맨앞과 맨뒤에 <이야기 밖>이 제시되고 있다. 퀀텀 패밀리즈의 마지막에서는, 주인공 유키토가 '이 현실'을 되찾기 위해 시오코가 든 칩을 부숴버리는 것과, 그렇게 다다른 '이 현실'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속죄하는 것을 통해 단독적인 '이 현실'을 인정해 나가는 것이 그려진다. 여기에서는 크립키 식 양상논리(재미있게도, 퀀텀 패밀리즈에서도 크립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고 있다.)로 아즈마가 그린 '이 현실'이 수많은 '가능세계'들을 바탕에 둔 '이 현실'일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진정 '현실적'이다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 밖'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다는 것은 다분히 크립키를 의식하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찌됐건 퀀텀 패밀리즈에서는 <이야기 안(1부, 2부)>에서 신체를, 현실을, 캐릭터를 힘껏 펼침으로서, <이야기 밖>에서 펼친 것들이 수렴되어(이것은 수동태이다) 인정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 혹여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퀀텀 패밀리즈의 마지막은 충분히 '이 현실'과 '이 나'에 대한 인정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는, 여기서 '신체'적인 것은 나타나지도 않지 않은가? 대체 퀀텀 패밀리즈의 어디에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다는 거냐? 엉?!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에서 다루겠다.


3) 시오코의 독법

 일단 질문해보자. 우리는 시오코를 어떤 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오코는 (1) 확장된 신체=시스템으로서 펼쳐져 있던 '캐라'들을 수렴시켜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2) 캐라 간의 매개로서의 공간인 '데이터베이스(아즈마)=동일 우주(라이프니츠)'로부터 테크니컬한 처방을 거쳐 생겨난 <일반의지(루소, 아즈마)>이다. 또한 소설 내부적으로 말하자면, (3) 시오코는 평행세계의 유키토가 주장했던 "글로벌 베이직 캐퍼빌리티와 퀀텀 라이프로그에 기반한 양상 후생경제학"으로부터 탄생한 결과물이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유키토의 말처럼 "지하생활자들을 극적으로 구제"하기에 이른다.

 일단 (2)와 (3)부터 설명해보자면, 유키토가 블로그에 푼 썰들은 어떻게 읽어도 아즈마가 일반의지 2.0에서 했던 말의 변주이다(...) 퀀텀 패밀리즈에서 유키토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이다. 퀀텀 라이프로그를 가지고 적절한 계산을 통해 유효한 결과를 내서, 이것으로 개개인에게 보다 밀착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자. 그리고 일반의지 2.0의 주요 주장이 바로 라이프로그 등의 인터넷에 축적된 개개인의 데이터들을 구글과 같은 적절한 테크놀로지를 통해 걸러내어, 공통되어 있는 대중들의 '사고'를 찾아내어(이것이 곧 일반의지이며, 일종의 집단지성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사실상 동일한 말을 SF 배경으로 살짝 변주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시오코란 아즈마가 생각하고 있었던 '일반의지'의 캐릭터화모에화라고 생각해도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반의지'의 힘으로 유키토는 모든 사태의 원인이 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고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자기는 자기가 주장한 것에 의해 자기가 제일 처음 혜택을 받는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비극적인 점. 이런 것을 '헛소리'라느니 '유행에 뒤지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대강 평가하고 넘어간 임태훈씨의 근무태만에 나는 과연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시오코가 '확장된 신체'라는 것=(3)은 이런 이야기이다. 신체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뭐랄까 생리적인 것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신체란 결국 뭘까? 신체는 결국 기계이며, (신체=기계라는 이 대단히 오래된 주장은 데카르트 이래의 것으로 수많은 비판의견에 직면하여 왔지만, 결국 과학이 발달해 갈수록 옳은 주장으로서 판명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정신은 유물론적 세계의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정신이 신체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우리, 우리의 자아, 우리의 정신은 '신체' 외부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이 신체는 확장되어서는 유물론적 세계이며, 우리는 유물론적 세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바꿔 말해도 상관없다. 정신이 신체를 넘어선 것, 세계를 넘어서는 것을 상상한다고 해도 결국 넘어설 수 없다.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넘어서는 것을 상상해도 강제적으로 수렴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오코는 확장된 신체=시스템이 된다. 시오코는 신체=유물론적 세계의 캐릭터화모에화로서, 이야기 안 세계(=뇌내세계) 이곳저곳에 펼쳐져 있던 상상적 정신들(캐라)을 강제적으로 이야기 밖(=데이터베이스적 세계)으로 강제 수렴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때에 또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퀀텀 패밀리즈의 어디에, '시오코'의 존재에 대한 유키토의 긍정적 생각이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는 시오코를 부숴버리지 않는가? 라는 질문.

 이런 질문은 임태훈식 문제제기보다도 본질적이다. 그렇다. 유키토는 시오코를 긍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하지도 않는다. 시오코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완전히 기계이며, 그것도 작동을 임의로 멈출 수 없는 기계이다. 이것은 멋대로 작동하여 이야기를 종결시킨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결국 일종의 의미부여를 통한 도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리하여 임태훈의 문제제기, 신체를 긍정하는 것이냐 부정하는 것이냐라는 통속적인 대립은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다. 신체에는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이전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신체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결국 임의의 의미 부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 단지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퀀텀 패밀리즈는 그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퀀텀 패밀리즈」는 <이 현실>도 <이 신체>도 긍정하지 않는다. 단지 험난한 여정을 거쳐, 그것을 인정할 뿐이다.
 퀀텀 패밀리즈의 독해는 여기까지로 충분할 것이지만, 개인적인 고찰을 몇 글자 추가해보고 싶다. 바로 라이프니츠와 아즈마 히로키에 대해서다.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모나드>란 아즈마 히로키의 <캐릭터>이고,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동일 우주>란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와 완전히 상등하지 않을까 싶다.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말한다. 모나드 사이에는 창이 없지만, 동일 우주를 매개로 하여 서로 교통한다. 이는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캐릭터 사이에는 직접적 연결요소가 없지만,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근본적인 부분에서 서로 이어져 있다고. 또한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말한다. 동일우주의 부분부분들을 모나드가 표출하며 모나드는 다수적이며 개별적이다. 이는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분을 캐릭터가 표출하며 캐릭터는 다수적이며 개별적이다. 개인적으로 아즈마 히로키와 퀀텀 패밀리즈에 대한 비판은 이런 점에서부터, 그에게서의 <고유명>과 <타자>와의 <관계>문제를 되짚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에 별 네개를 준 이유를 말하겠다. 개인적으로는 퀀텀 패밀리즈에서의 <시오코>보다는 CLANNAD에서의 <우리들=플레이어들>이 보다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즈망 더이상의 카킷코짓은 NAVER...

ps. 이 글은 경소설회랑시드노벨 그리고 애니큐어 카페(맴버공개)에도 업로드 되었습니다.

덧글

  • 늅실러 2013/01/02 19:43 # 답글

    먼저, 퀀텀 패밀리를 무척 잘 만든 책이라곤 생갇합니다만 ... 신체성의 옹호자로서 과연 임태훈씨의 논리가 그렇게 빈약한가에 대해서는 더 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그가 끌고 들어온 시스템=픽션의 극대화인 뇌화사회개념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신-신체 이원론으로 나누어도 좋을지는 의문입니다. 다만, 그건 일반의지2.0을 모두 읽은 뒤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여기까지..
  • kurame 2013/01/02 19:56 #

    뇌화사회의 언급에서도 그는 종래의 정신-신체의 이분법을 뇌-그외의 신체의 이분법으로 바꾸어 놓고 결국 같은 논의를 반복할 뿐이라고 생각해서... 애초에 저는 퀀텀 패밀리즈가 신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임태훈씨의 독해 자체부터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요(...)
  • 2013/01/16 20:2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25 18: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27 16:1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31 13: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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