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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1 06:37

슈거 다크 감상 라노베


 처음에 간략한 줄거리를 보고 끈적끈적하고 어두운 작품일 거라고 예상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던 작품으로, 개인적으로는 드라이하고 어두운 느낌이 그럭저럭 취향에 맞았으나, 아마도 이러한 작품의 분위기는 대단히 취향을 타지 않을까 싶다. 딱히 감동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느낌도 없으며, 클라이막스에서의 긴박감도 그다지 없고, 히로인 메리아는 그럭저럭 매력적으로 그려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막 지켜주고 싶다는 마초심리가 치솟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다고 하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설정이 특이하므로) 결국 기본골격이 보이 밋 걸인데 정작 이런 부류에서 그려지게 되는 장면들을 매혹적으로 묘사해냈는지라고 묻는다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긴박감이 넘치는 작품을 기대했던 독자쪽도, 애절한 보이 밋 걸을 기대했던 독자쪽도 실망했을 것 같다.

 뭐 여기까지 말하고 끝내면 완전히 혹평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괴이하다.

라고 말하면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ANG?' 할지 모르겠지만 역시 이 작품은 괴이하다. 이 작품은 보이 밋 걸이라고도 미스터리 스릴러라고도 할 수 없지만, (따라서 어느쪽도 아닌 '덜 된' 작품으로 평가하는 관점에 대놓고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스릴러도 연애물도 아닌 다른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스니커즈 대상이라는 라이트노벨 최고의 상으로 불리는 상을 탄 이유는, 바로 그 다른 무언가 때문이지 않을까. 앞으로의 글은 이 가정에 의존하여, 그 다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추리해 나가는 과정을 취한다. 


1. 더 다크라는 존재


 소설에서 더 다크와 관련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을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것은 인류의 천적으로, 인류는 이것에 닿기만 해도 죽을 것 같은 거부감을 느낀다. (작중 주인공 무올은 어마어마한 거부감을 견디며 더 다크를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더 다크는 인류의 천적이라, 인류 문명의 진화를 은연중 가로막아 왔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더 다크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더 다크는 귀신과도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대치되어져서 사람들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작중의 현재에 이르러 (작중의 현재란, 총이 발명되고 참호전이 벌어지는 근대이다.) 더 다크를 죽일수는 없지만 땅에 <묻는> 방법으로 봉인시키는 방법이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더 다크라는 공포에서 그럭저럭 해방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서술들로부터는 대략 이런 의문점들이 튀어나온다. 

 첫째, '어떻게' 더 다크가 문명의 진화를 가로막았는지라는 메커니즘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둘째, 더 다크의 수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더 묻어야 하는지도 말하고 있지 않다. 

 보다 나아가면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다. 애초 더 다크는 왜 작품에 그려졌으며, 왜 더 다크는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저런 설정들을 가질 만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을까? - 더 다크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어디서 왔는가?

 이후로는 독자해석으로 이런 의문들에 답해본다.

 일단 작중에서 문명의 진화(작중으로 따지자면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진화)를 가로막은 <무언가>는 현실에선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가라타니 고진만큼 철저하게 파고든 사상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라타니는 「세계사의 구조」에서 미니세계시스템(원시 씨족 사회)에서 세계=제국(아시아적 전제국가), 세계=제국에서 근대세계시스템(근대국가)으로의 변화에 대해 여러가지 고찰을 해내고 있지만, 그 고찰 중 하나가 <주술력>에 대한 것이다.

 미니세계시스템에서 <주술력>은 증여라는 교환관계에 의해 매우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기능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우리가 디씨를 하며 매우 훌륭한 짤을 갤에 올린다고 하자. 이것은 그 갤의 갤러들에게 짤을 <증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증여>는 무상증여인듯 보이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증여 안에 <모종의 힘>이 깃드는 것이다. 이 모종의 힘에 의해 갤러들은 짤 업로더에 대해 고마움과 빚을 졌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짤 업로더를 치켜세우고, 찬양한다. 이때 갤러들이 짤 업로더를 치켜세우고 찬양하게끔 만드는 힘, 이것이 일종의 <주술력>이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이던 <주술력>이 세계=제국에 들어서면 <종교>라는 신시스템 안에서 보다 은밀해진다. 우리는 신에게 <증여>함으로서 신이 우리를 치켜세워 주기를(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 주기를) 바란다. <주술력>이 종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묻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묻힘>은 세계=제국에서 근대세계시스템으로의 이행에서는 보다 래디컬해진다. 시스템 안에서 존재하던 <주술력>은 이제 그 시스템의 붕괴(="신은 죽었다.")와 새로운 시스템의 성립(=종교의 대체로서의 네이션, 문학 등의 <이야기>)에 의해 보다 은밀하고 비가시적이 된다. 즉 어떻게보면 원시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주술력을 더, 보다 더 <묻어>버리는 것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라타니는 미니세계시스템에서 세계=제국의 단계, 세계=제국에서 근대세계시스템의 단계에서 각각 묻혀가는 <주술력>에 반발하는 운동들이 있었으며, 이런 운동들이 문명의 진화를 가로막았다고 서술한다. 

 그런데 이 <주술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라타니는 이를 <교환>에서 찾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적 용어로는 <(집단)무의식>으로부터 이 <주술력>이 생긴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기에는 사실 사전적 관점과 사후적 관점이 문제로 부상한다. 교환이 사전적 관점에서의 모습이라면 무의식은 사후적인 관점에서의 모습이겠지만, 깊이 논의하자면 복잡해지므로 그냥 이렇게 짚고만 넘어가겠다.) 우리는 <증여>에 대해 <무의식>에서부터 부담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현실에서 <힘=주술력>으로 발휘된다. 이러한 <무의식>이 <의식>과 분리되지 않을수록 주술력은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근대로의 이행은 <주술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임과 동시에 <무의식>과 <의식>을 분리시켜 무의식을 의식속에 <묻어>버리는 과정이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에 이르러 프로이트가 밝혀낸 <무의식>이 그토록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다크>에 대한 작중의 서술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인류는 더 다크(=집단무의식)에 닿기만 해도 거부감을 느낀다. 또 더 다크(=집단무의식)는 작중에서는 서술되지 않는 모종의 메커니즘(=주술력)에 의해 문명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더 다크(=집단무의식)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귀신과도 같은 것(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우리를 맘대로 규정하려 든다=무의식)으로서 새겨져 있었다. 현재(=근대)에 이르러 더 다크(무의식)를 효과적으로 묻어버릴 수 있었다. 더 다크의 수는 규정되지 않고 있다. (아무리 파묻어도 집단무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런 연유로, 더 다크라는 괴물은 그야말로 (집단)무의식의 은유가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발견한다.


2. 신 창세기 ~배경편~


 또 특이한 점은 이 작품이 성경의 '창세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중에서 메리아도, 무올도 나무에 열린 열매를 먹고 새로 태어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째서 굳이 창세기적인 것을 채용하고 있을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답은 간단하다. 위에서 썼던 근대적인 상황들에서부터, 모든 것이 변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더 다크를 묻고, 그 위에 나무를 심었다는 작중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나무>라는 것은 아키텍쳐=시스템의 기본 구조이다. 이 <나무>는 더 다크 위에서 자라면서, 더 다크를 <땅 밖>으로 표출시킨다. 그 표출 결과가 나무의 <열매>로서 나타난다. 이때 나무는 나무로서 기능하고 있으면서도(따라서 열매를 맺는다) 한편으로 더 다크를 표출한다. (따라서 그 열매의 모습은 <심장>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 것일까?

 우리는 <인터넷>이 발달한 이 사회에서 자명해진 논리 하나를 끄집어 낼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의 무의식이 무분별하게 표출된다. 이 뻔한 논리는 악플 관련 기사나 뉴스를 몇번 본 사람들이라면 이미 익숙할 것이다. 이 논리를 보다 아카데믹하게 표현하자면, 인터넷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스템>이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의 <무의식>을 <가시화=표출>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여기서 슈거 다크를 끌고 오자면, <인터넷>은 곧 나무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더 다크>이고, 그 무의식이 표출된 <결과물>이 <열매=심장>인 것이다. 혹은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를 끌고 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인터넷에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그 <데이터베이스>의 특정 형태로의 표출- 예를 들자면, <모에 요소의 조합>=<열매>인 것이라고. 

 더 다크를 땅에 묻는다는 것까지는 명백히 근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더 다크가 묻힌 땅 위에서 <나무>를 심어 <열매>를 수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현대의 이야기이다. 이런 식으로, 근대에서 현대로의 시프트가 슈거 다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배경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쳐도, 그렇다면 캐릭터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여기에는 지극히 흥미로운 문제가 존재한다.


3. 신 창세기 ~캐릭터편~


 슈거 다크의 캐릭터들은 <열매>를 먹고 새로 태어난다. 좀 전에 위에서 말했지만, 나는 <열매>가 아즈마 히로키적인 관점에서 <모에 요소의 조합>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었다. 여기서 뭔가가 떠오르는 사람은 라이트노벨 작가로서 그럭저럭 감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캐릭터들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캐릭터들이 <데이터베이스 조합=모에 요소>를 이용하여 재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종래 자연주의적이었던 캐릭터들은 <열매>를 먹는 순간 라이트노벨적인 <캐릭터>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나고 있다.  라이트노벨적인 <캐릭터> - 이토 고의 용어로 치자면 <캐라>성을 폭발시킨 <캐릭터>는 슈거 다크에서 지극히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 <죽지 않는 신체>라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책 내용을 떠올려보라. <열매>를 먹은 순간 슈거 다크의 <캐릭터>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여기서 이쪽 평론에 그럭저럭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츠카 에이지라든가 아즈마 히로키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오츠카 에이지가 제기한 캐릭터가 가진 기호적 신체의 문제 - 죽지 않는 신체라는 문제는 슈거 다크에서는 완전히 아즈마적으로 해결되고 있다.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스스로 <열매=데이터베이스 요소=기호>를 먹을 것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결코 죽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 창조된 캐릭터들은 더 다크에 대해서도 관계의 변화를 겪는다. 종래의 자연주의적 캐릭터는 더 다크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했지만, 창조된 <캐릭터>는 오히려 자기보다 작은 규모의 <데이터베이스 요소>=<더 다크의 개체>를 접촉에 의해 정지시킨다. 어째서 더 다크는 이 <캐릭터>에 닿으면 정지해버리는 것일까? 왜냐하면 이런 류의 <캐릭터>에게 있어서는, <더 다크>=<데이터베이스 요소>가 두려워해야할 무의식이 아니라 자신을 재구성 할 수 있는 <도구>의 위치로 시프트해 버리기 때문이다. 더이상 무의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이 무의식=데이터베이스에 의해 공공연히 재구성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캐릭터에 의해 <도구>로서 환원된 <더 다크>는 그 운동성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을 들자면, 까마귀라는 존재의 구성방식이다. 메리아의 언니는 <캐릭터>일 것을 포기하고 태양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하지만 분명히 작중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엄밀히는 죽지 않는다. 그녀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데이터베이스 요소>가 묘지 어디엔가에 남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 밖의 여러 캐릭터들의 요소들이 합쳐져 새로운 캐릭터=까마귀가 구성된다. 까마귀라는 존재의 구성방식 자체가, 결코 죽지 않는 기호적 신체를 가진 캐릭터의 끈질긴 불사성과, 라이트노벨의 캐릭터 작성방식 자체를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플레이어와 히로인


 지금부터는 좀 더 독특한 이야기로 들어가겠다. 슈거 다크의 캐릭터의 <특이성>이 가장 크게 표출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캐릭터가 <열매>를 먹을 것을 스스로 선택할 때이다. 생각해보라. 이야기 안의 캐릭터는 결코 라이트노벨적 <캐릭터>가 될 것을 (기호성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 선택은 보통 캐릭터가 아니라 작가가 한다. 이것은 그저 오류인 것일까? 아니면 캐릭터를 단순 인간이라고 평범하게 생각한 결과인 것일까? 일단 후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소설을 둘러싼 환경(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자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난 이것이 단순히 오류라고 보지도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의도되어 있다.

 나는 종전에 위에서, 열매를 먹음과 동시에 캐릭터는 기호성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라이트노벨적인 <캐릭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순 <캐릭터>여서는 선택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몇 단어가 더 붙여져야 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플레이어)의 아바타로서의 캐릭터. 즉, 그가 열매를 먹을 것을 스스로 선택할 때, 그는 종래와는 다른 의미의 캐릭터가 됨과 동시에, 캐릭터를 일정부분 초월하는 플레이어적 특성을 가져버리는 것이다.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중에서 무올의 태도에 대해 고찰해보면, 무올은 그야말로 철저히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 자신이 캐릭터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일단 예의 창세기의 모티프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과를 먹고 원죄가 생겼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슈거 다크에서는, 무올은 열매를 먹고서도 죄의 ㅈ자도 꺼내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메리아에 대한 일종의 배신행위인데도 말이다. 더한 것은 메리아를 죽이는 씬이다. 그는 완전히 플레이어적 관점에서 메리아를 가차 없이 죽여버린다. 그는 메리아를 위해서 메리아를 한번 죽이고 메리아가 없는 루트를 반드시 탈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그녀를 죽인다. 그러고도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하고,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메리아가 자신의 손에 죽은 것은 플레이어 식으로 말하면 <다른 루트>에서의 일과 똑같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키즈아토와 같은 고전 에로게를 생각해도 좋다. 이런 게임에서는 배드엔딩을 한번 보지 않으면 결코 해피 엔딩을 이룰 수 없기에, 반드시 히로인은 한번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마치 <슈거 다크>라는, 키즈아토와 비슷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처럼, 무올은 그와 완전히 동일한 태도로 메리아를 죽여버리고 있다. <열매>를 먹는다는 것 자체도 비슷한 태도이다. 무올이 열매를 먹고 기호적 존재로 변신하는 행위는 플레이어가 특정 분기에서 <세이브>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무올이 가능성있는 루트를 타기 위해 열매를 먹었듯이, 플레이어도 가능성 있는 루트를 타기 위해 세이브한다. 

 슈거 다크가 끝나면서, 무올은 종래 자신이 갇혀 있었던 이야기적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쉽게 말하면 목에 차고 있던 구속구를 벗고 늙은 영감을 죽이고 자유를 쟁취한다. 이로서 무올은 캐릭터로서의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던 핵심적인 이야기적 맥락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일단, 무올은 자신을 구속하던 <자연주의적인 맥락>을 모조리 제거하고, 자유로운 라이트노벨의 캐릭터로서 다시 태어난다. 즉 라이트노벨 캐릭터로서 메타-이야기적인 기호성을 가진다는 점에 장애물이 될만한 것들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무올은 이로서 <플레이어>와도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된다. 플레이어는 이야기에 대해 메타적이기에 플레이어인 것이다. 

 사실 <구속>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메리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태양을 보면 죽는다>라는 구속에서 해방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다. 한번 메리아를 에로게의 <히로인>의 위치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 보자. 에로게 히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구속>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인공의 선택을 받아야만 한다>라는 구속이다. 에로게 히로인에게 있어서 주인공의 선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그것이 에로게 히로인으로서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메리아가 끝내 주인공에게 선택받고, 마침내 태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은유적이다. <주인공의 선택을 받아야만 한다>라는 유일최고최종의 구속을 벗어던진 그녀는, 드디어 <맥락>을 제거한 메타 이야기적인 캐릭터로서 설 수 있다. 그렇다. 그녀는 마침내 암흑(구속=맥락) 속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태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문제적인 질문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야기적 맥락을 벗어나 자신의 메타 이야기적 가능성을 힘껏 펼쳐보이는 캐릭터와, 그와 비슷하게 메타 이야기적 입장에서 여러 루트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어디까지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 그 구분이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일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하며, 불가능하다면 어디서부터 불가능한가? 이 문제는 어쩌면 <슈거 다크>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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