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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2 14:18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을 읽고


1.

 출판된 지 꽤 된 책이니, 상당히 늦은 감상문이다. 예전에 읽고 바로 무언가를 써서 올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었지만, 시험기간도 겹치고 해서 이제야 글을 쓰게 된다. 솔직히 뭔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워드 프로세서를 켜놓고 뭔가 학업과 관련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어색한’ 일인데, 근 몇 달간 실험 레포트 쓸 때 빼고는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사적인 감상 따위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난 어색하다. 어색해서 몸이 쑤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지금 어색함을 무릅쓰고 키보드를 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이 글을 쓰도록 추동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글의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하도 오랜만이라) 전혀 감이 잡히지 않으므로, 일단 이 동기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해보고 싶다. 

 일단 박가분씨의 이 책(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은 상당히 재미있었게 읽었고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가라타니 고진을 상당히 좋아하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지인들에게도 이미 많이 추천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게 동기는 아니다. 뭔가 묘하게, 난 이 글을 읽고 견딜 수가 없다는 기분이 있었다. 그래서 기분의 정체가 뭐인지 좀 정리해보니, 난 이 책을 읽고 심하게 뭔가 눌려버린 것 같다. 버튼이 눌린 건 아니고, 그냥 가만있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일 때문은 아니지만 여하튼 비슷한 이유로 트위터도 그만뒀다. 답답해서. 이 글은 내 답답함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해명해보려는 시도다. 물론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인간이라 버거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난 절대 무리(웃음)지만, 애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발버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니 키보드를 치고 있으니까 손버둥인가... 여하튼 한번 열심히 쳐 보겠다.

2.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부터 시작해 보자.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라타니는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수학의 무모순적인 공리 체계 내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포함된다.” 는 내용이다. 그런데 가라타니는 서양 근대철학의 토대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타격을 가했어도, ‘수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책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에서 <은유로서의 건축>을 인용한 부분을 한번 그대로 인용해 보자.

 “수학에서의 실질적인 발전은 토대 그 자체엔 무관심한 응용수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제로 수학의 발전은 말 그대로 비합리적으로 진행되어왔다. 따라서 괴델의 증명이 수학을 불확실성의 지점에까지 밀어붙였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당하게 그 어깨에 놓여 있던 너무나 무거운 확실성의 짐에서 수학을 해방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핵심에 더 다가가 보면, 괴델의 증명은 건축적 체계의 환상으로부터 수학을 해방했으며, 또 수학을 규범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체하면서 건축적 체계는 항상 그 토대가 부재함을 감추어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학은 그것이 동어반복적이어서 견고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정확히 말해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발전한다. 말하자면 수학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강조 인용자)

 여기서 수학은 ‘형식적’이지만 그러면서도 ‘하나의 건축적 체계’는 아닌 것으로서 서술된다. “수학이 수와 양에 관한 학문이라는 낭만주의적인 관념과 대조적으로, 수학은 오직 관계만을 탐구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수와 양조차도 관계의 형식이다.”(은유로서의 건축 45쪽, 강조 인용자)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 ‘형식적’인 것과 ‘체계’는 동일한 것이 아닌 것이다. 형식적이면서도 건축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박가분씨는 시작부터 “그런데 가라타니는 그와 같은 수학의 ‘형식화’ 또는 ‘체계화’가 수학 발전에 반드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39p)고 한다. 정말 가라타니가 이 그대로 말했는지는 내게 은유로서의 건축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가라타니는 그 자신의 입으로 수학은 ‘관계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학은 괴델이 무너뜨린 ‘체계’와는 관계가 없다. 박가분씨는 처음부터 이 둘을 혼동하고 있다.

 물론 가라타니는 “형식주의자들이 암암리에 플라톤적 문제 틀로 되돌아”(71p)간다고 말한다. 또 그는 “반격자는 초월적 코기토를 감추고 있다.”(146p)라고도 한다. 그런데 가라타니가 이런 것을 말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형식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토대’를 묻지 않는다.”(71p) 바꿔 말하면, 형식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토대’를 묻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제로기호’, 초월적 코기토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즉 ‘묻게’ 된다면 괴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는 것은 “철학의 책임”(71p)이다. 바꿔 말하면, 수학 자체만으로는 이런 비판에 직면하지 않는다. 즉 할 수 있는 한 형식적이려고만 한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묻게’ 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비슷한 서술은 반복되는데, 예를 들면 “우리는 인공지능을 ‘제작’함으로써만 자연지능에 접근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괴델의 증명에서 목격한 바 있다.” 같은 문장 또한 그렇다. 수학적 형식화로 인공지능 혹은 인공언어를 리좀 개념이나 반격자형 구조로 대체하는 것 까지는 좋다. 하지만 이를 ‘자연언어’에까지 접근시키려고, ‘제작’을 시도하면 필연적으로 괴델의 문제와 맞닥뜨린다. 즉, 형식적인 것과 체계적인 것 사이는 직접적인 등치가 불가능하다. 만약 등치가 가능하다면, 그 전제조건으로서 ‘사이’에는 ‘제작’과 같은 건축에의 의지가, 혹은 ‘책임’과 같은 주체의 문제가 ‘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박가분씨는 하지만 은연중 ‘체계’과 ‘형식’을 동일시하며, ‘체계가 아닌 형식’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오독해낸다. 박가분씨는 형식화의 문제를 구조주의 언어학의 문제(44p)의 문제로 생각한다 말하는데, 구조주의 언어학은 말할 것도 없이 괴델적인 문제계에 속한다. 박가분씨가 이 둘을 계속해서 혼동하는 반면, 가라타니는 이것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그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철저하게 형식적이려’ 했던 것은 그래서였다고 해도 좋다. 박가분씨에게 있어서 형식적인 것은 제로기호로의 수렴과 어디까지나 ‘동일’한 것에 대해, <은유로서의 건축>에서의 가라타니에게는 ‘철저히 형식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서는 괴델적 문제계로 수렴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춤추는 사람과 그가 추는 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중략) 이 문장에는 각기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독해 방식(컨스터티브와 퍼포머티브 - 인용자)이 공존하는데, 그 둘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지 않다. (......) 실제로 구조주의적인 건축에 대한 의지가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만 텍스트의 애매성이 문제가 된다. 더욱이 텍스트의 애매성은 체계화하고 합리화하려는 구조주의적 욕망이 의도하지 않은 반대의 결과를 산출한다는 역설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텍스트의 애매성은 역사적 회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형식화에 의해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113p 강조 인용자)

 “실제로 구조주의 ~ 역설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의 부분까지는 괴델적인 문제계 안에서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라타니의 생각으로는, 텍스트의 애매성이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즉 애매성이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은 괴델적인 문제계 안에서가 아니라, ‘오직 형식화에 의해서만’이다. ‘구조주의적인 건축에 대한 의지가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이 아닌 오로지 ‘철저히 형식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만 텍스트의 애매성은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괴델적인 문제계와 형식화 자체의 문제의 비동일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박가분씨의 경우 이 인용문구에 대해 “텍스트의 애매성은 드 만이 보여주었듯이 작품 자체의 구조를 형식화하려는 의지 속에서만 드러난다.”(47p) 라고, 즉 애매성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있고 해소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형식화의 문제가 어디까지나 괴델적 문제계에 속한다는 것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무시되는 것은 텍스트의 애매성이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부분, 즉 애매성이 있다는 전제 자체가 통용되지 않는 레벨의 설명에 대해서이다. 그는 ‘묻는다’라는 사이를 계속해서 생략한 채 둘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박가분씨는 이후 가라타니의 고민에 대해 정리한다. 그에 따르면 가라타니의 고민은 ‘건축에 대한 의지’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폐색감이다. 즉 어떻게 해서든 괴델적 문제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폐색감이다. 형식화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괴델적 문제계에 회수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물음’이라는 가라타니가 반드시 끼워넣는 중간단계를 제거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납득할만한 해석으로 보인다. 실제, <은유로서의 건축>에서는 이 ‘물음’에 의해서지만 어쨌든 한계를 맞는다. 가라타니는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자기지시성의 역설을 말하지만, 박가분씨도 서술하고 있듯이 이것은 초월적 코기토로 회수되어 버린다. 즉,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은유로서의 건축>에 대한 박가분씨의 해석은 ‘물음’이라는 사이를 생략해버린 감이 있지만 그럭저럭 타당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한편, 다른 면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박가분씨는 이런 해석을 그대로 이 책의 끝까지 끌고 가고 있다. 하지만, 가라타니의 경우 정말로 이후로도 초월적 코기토로서 회수되어 버리는 형식화밖에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박가분씨가 생략한 것으로서의 ‘물음’의 문제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여기서의 ‘물음’이라는 것은 자기반성적 물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은유로서의 건축에서의 ‘물음’이란 자기자신의 자기자신에 대한 물음, 즉 독백인 것이다. “주관이 주관에게 직접 묻는 것, 또 정신의 이런저런 자기반성은 위험한 것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신체에 묻는다.' (권력에의 의지) 이렇게 말할 때, 그는, 의식에의 물음, 즉 내성에서 시작된 철학이 이미 하나의 결정적 은폐 아래에 있다는 것을 고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 내성과 소행) 독백은 괴델적 문제계로 회귀하며, 이는 가라타니가 말하는 ‘대관계’적인 커뮤니케이션, 타자에 대해 열린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가라타니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천착한 글을 하나 알고 있다. 바로 <탐구 1>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나는 탐구1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니, 그보다도 탐구1적인 문제의식을 가장 철저화한 것으로서의,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의 2장과 3장 사이에 <탐구1>이 사실상 <탐구2>의 부속으로서 취급되고 있다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3장의 부제는 ‘탐구2와 유머로서의 유물론을 중심으로’이다. <탐구1>은 <탐구2>의 가능세계론적인 것에 대한 설명으로서만 해석되며, 내 충동은 이에 대한 불만과도 관계되어 있다. 박가분씨의 해석과는 달리, 탐구1은 결코 괴델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괴델처럼 러셀을 기초론적으로 비판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탐구 1 143p)

3.

 시점을 돌려서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에 대해 알아보자. 이 책의 1장은 웹상에서 번역되어 떠돌고 있기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 우편적은 4장까지 존재하며, 1장은 이 책 주제의 전모를 간신히 드러내는 수준에 그친다. 예전에 소조씨가 번역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아마 좌절된 것 같아 유감이지만, 어쨌든, 부족한 독해력으로나마 이 책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이 책의 처음에서 아즈마는 통상적인 해체론을 간단하게 요약한다. 그것은 컨스터티브와 퍼포머티브에 대해 그 구별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전략, 즉 폴 드 만적인 이중소속의 문제(어떤 언명이 컨스터티브한가 퍼포머티브한가를 결정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폭로)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아즈마는 ‘다의성’과 ‘산종’의 차이에 주목하며, 파롤 그 자체도 에크리튀르 그 자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기호를 파롤로서 파악하는가 에크리튀르로서 파악하는가 하는 시점의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서술한다. 즉 ‘다의성을 넘어서있는 산종’이라는 식의 신비주의적인, 에크리튀르를 전제하는 식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하며, '항상 복수적 콘텍스트 사이에서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서의 산종‘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처음부터의 질문은, 복수의 콘텍스트들 사이에서 사후적으로 산종을 발견해내는 전략, 즉 통상적인 해체주의적 전략에서 어째서 데리다가 후기 데리다에게서 보이는 텍스트 놀음으로 이동했느냐에 있다. 또한 아즈마는 방금 말한 식의 통상적 해체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통상적 해체론이 가지는 비정치적인(현실 긍정적인) 함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책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그는 “텍스트 공간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간텍스트성이나 저자성의 탈구축 같은 술어에 의한 그 신비성은, 현실적으로는 여러 세속적 욕망이나 이데올로기를 숨기는 것으로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데리다의 전기는 실제 이와 같이 기능하고 있었고, 데리다가 앞으로도 이렇게만 읽힌다면 데리다를 전혀 읽을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존재론적 우편적 78p) 그리고 그는 데리다의 후기 데리다적인 것으로의 전회를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전회로서 이해하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확히 어떤  성질의 전회인가? 또 그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 - 바꾸어 말하면, 위에서 내가 말했었던 ’괴델적 문제계‘에 속하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단 말인가?

 아즈마는 ‘괴델적인 문제계’에 속한 탈구축을 ‘괴델적 탈구축’(2장)이라 부르며, 이는 부정신학으로 빠지기 쉽다고 본다. 여기서 부정신학이란 긍정적=실증적인 언어표현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부정적 표현을 매개하여서만 포착하는 것이 가능한 무언가가의 존재를 상정하는 사고이며, 이는 형이상학적이다. 그리고 그는 괴델적인 문제계에 속하지 않은 탈구축을 ‘데리다적 탈구축’이라 부르자고 일단 가정하면서, 후자의 가능성을 체계를 비판하는 것에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편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열어버리는 것, 가라타니 식으로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의 비대칭성’에서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미 데리다는 60년대부터 그 자신이 제시한 여러 역설적 관념(예를 들면 차연)과 같은 것이 부정신학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는데, 부정신학에 빠진다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서 데리다가 라캉 비판을 행한 것에 아즈마는 주목하고 있다. 아즈마=데리다에 따르면,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에서 편지는 일단 수신인에게 무조건 도달하는 것으로서 생각된다. 즉 정보는 전달과정에서 “왜곡되는 일 없이” 발신지의 상태와 같은 상태로 도달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을 아즈마는 ‘현전의 사고’라 부르며, 이와 같은 말하다-듣다의 레벨이 아닌 비대칭적인 커뮤니케이션 레벨에서라면, “우편은 반드시 일상적으로 수신인에게 도달할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우편은 일상적으로 수신자에게 닿는다, 고 라캉은 서술한다. 데리다가 가장 주의하는 점은 여기에 있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편지는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편지는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97p) 

 이 비대칭성은 매체적으로는 데리다가 자주 드는 예인 ‘편지’, ‘전화’에 있어서의 시간적, 공간적 차이화로서도 고찰된다. 그런데 라캉은 이 비대칭성을 무시하고 “최대의 일관성을 갖고 탈구축 가능한 모티프를 접합하는 철학적 재구조화를 행한다.”(97p)

 탈구축이란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의 경험’이며, 현실계란 라캉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둘에게 있어서 체계적=철학적 사고에 의해 역으로 그 존재가 고백되어 버리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흔적 찾기까지는 동일하다고 아즈마는 말한다. 즉, 괴델적 탈구축을 행한다는 측면에서 둘은 비슷하며, 이것은 전기 데리다와 라캉 간의 비슷함으로서도 고찰된다. 하지만,

 “라캉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사고의 역사를 재구성하며, 여러 철학적, 문학적 언설로부터 그 흔적들을 찾아서 그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해 버리고 만다. 프로이트도 하이데거도 ‘안티고네’도 ‘햄릿’도 ‘도둑맞은 편지’도, 실제로는 모두 ‘현실계’에 대한 ‘대상 a'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이 퍼스펙티브에 있어서는, 사실상 역사는 말소되어 버린다. 이들 전부는 라캉적 문제의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저항하는 것은, 역사의 이 재구성=말소에 대해서이다.”(97p)

 “라캉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은 단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도 에드거 앨런 포도 자신도 동일한 ‘불가능한 것’에 직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같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인식은, 소포클레스나 소크라테스로부터, 여러 사상가들을 통과하여 라캉까지 배달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역사의 재구성=말소는, 이상적인 우편제도에 의해 보증받고 있는 것이다. 반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은 복수이며, 결코 하나일 수 없다. 그 때문에 자신도 프로이트도 똑같은 불가능한 것에 직면한다는 보증도 없다. ‘엽서’에서 제시된 은유에 따라 말하자면, ‘불가능한 것’은 오히려, 소크라테스로부터 플라톤으로, 플라톤에서 프로이트로, 프로이트로부터 자신으로 배달될 때마다 어딘가에서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98p)

 즉 라캉에게 있어서 배달경로, ‘물음’은 애초 당연한 것처럼 생략되어버리는 반면, 불가능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아즈마=데리다에게 있어서 역사=배달경로를 재구성하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 그것이 언제나 비대칭성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경우는 주체의 근원적 분열은 있어도 불가능한 것의 분열은 있을 수 없다. “라캉에 의하면 도둑맞은 편지에 있어서의 편지란 대상 a, 혹은 팔루스, 즉 여기서 현실계가 나타난다는 역설적인 시니피앙으로서 해석된다. 대상 a란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계의 직중에 뚫린 결여(=괴델적 결정불가능성)의 실체화embodiment, 말하자면 주체의 결락을 메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도둑맞은 편지는 소설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품은 결락 사이를 순환하며, 그것을 봉합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 때문에 라캉은 편지가 분할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 왕, 왕비, 대신, 듀팡, 경시총감은 각각 문제의 편지에 접하는 것으로 주체의 분할을 받지만, 그렇다해도 모두 ‘같은 편지’에는 접하고 있다. 여기서는 설사 주체가 분할되어 있더라도, 그 분할은 주체에 강압하는 ‘불가능한 것’, 상징계의 괴델적 균열 그 자체는 절대로 분할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위에서 했던 ‘물음’의 문제, 박가분씨가 형식적인 것과 체계적인 것 사이의 ‘물음’의 문제를 무시했다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이해해 본다. 그가 형식적인 것과 체계적인 것 사이를 동일시할 때, 즉, 사이의 ‘배달경로’의 문제를 무시한 채 형식적인 것을 전적으로 괴델적인 문제계 안으로 편입시켜 버릴 때 사실상 여기서 가라타니의 탐구 1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비대칭성 문제가 사상되어 버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젠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형식적인 것과 체계적인 것 사이는 전적으로 잘못 배달됨 없이 이어진다. 그에게는 '물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편지는 언제나 수신인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시 여겨지며, 망각된다. 박가분씨의 가라타니의 고유명론에 대한 검토는, 이런 전제 하에서 수행되고 있다. 그의 책에서 탐구1적인 문제가 검토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세계’의 것으로서 손쉽게 집어넣어진다. 하지만 박가분씨가 말하는 ‘가능세계’적인 것이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것의 분열이 아닌 오로지 상징계 레벨에서의 분열을 의미할 때, 커뮤니케이션도, 교통공간도 전혀 사고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라캉이 주체(=혹은 시스템, 텍스트)의 분할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이미 분할불가능한 ‘하나’의 ‘구멍’, ‘결여’에게 초월론적 역할을 맡기고 있다는 것, 즉 아사다 아키라식의 제로기호와 같은 것을 은연중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가분씨에 대해서라면 그것의 이름이 단독자이며 초월론적 통각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의 가라타니에 대한 비판은 이를테면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의 180페이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세한 지적은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생략하겠지만, 가라타니가 탐구 1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체계를 공유하지 못하는 타자의 문제를 박가분씨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애초 가라타니의 생각은 “위상이 잘못되었다.” 따라서 가격의 분할(주체의 분할)이 아닌 가치의 분할(불가능한 것의 분할)은 잘못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하지만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괴델적 탈구축과 불가능한 단 하나의 것과의 직접적 연결에는 ‘같은 편지’가 아닐 가능성, ‘같은 편지’가 아닐 수 있는 ‘교통공간’이라는 장소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사태를 좀 더 심도 있게 생각하기 위해, 이번에는 아즈마의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비판을 한번 검토해 보자. 아즈마는 지젝의 대상 a론을 <고유명>의 관점에서 새롭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일단 여기서의 ‘단독성’에 대한 설명은 어디까지나 아즈마의 의견이며, 나는 지젝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라면 아즈마에 공감하지만, 그의 단독성에 대한 의론에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달아 둔다.) 프레게, 러셀의 기술이론이라거나 크립키의 이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이미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간단히 요약해 보겠다. 크립키는 기술이론을 탈구축한 결과로서, 그야말로 ‘탈구축 불가능한 것’, ‘이론적 잔여’로서의 고유명의 단독성을 발견해 낸다. 즉 이것 또한 일종의 괴델적 탈구축이며, 결과로서 부정신학적인, 실증적인 것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의 고유명을 발견해낸다. 그러나 크립키에게 있어서는, 한편으로 고유명의 ‘유통’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는 괴델적 탈구축의 끝에서 잔여로서의 단독성을 발견해내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을 교통공간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신화를 필요로 하게끔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유통 과정에서 잘못 배달될 가능성을 어떻게든 무시하기 위해 ‘명명행위’나 ‘전달의 순수성’과도 같은 개념장치를 만들어 낸다.

 아즈마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지젝이 이에 대해 크립키를 비판하는 부분이다. (일본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p 89~100) 지젝은 크립키가 ‘현실계 le reel'와 ’현실 la realite'의 구별을 빼먹고 있다고 주장한다. 크립키는 고유명의 단독성의 근거를 현실 속에서 찾고, 결과로서 ‘전달의 순수성’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크립키는 ‘교통공간’에 대해 그것이 잘못 배달될 가능성을 애써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반해 지젝의 경우, 애초 단독성의 근거는 처음부터 ‘현실계’에서 찾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째서일까?

 “라캉파 정신분석에 있어서 ‘현실계’란, 상징계의 괴델적 균열을 지시하고 있다. ‘현실계’라는 세계가 실체적(포지티브)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상징계(인식되고 기호화되는 세계)를 구성하는 시니피앙의 순환운동은 불완전하며, 결과로서 반드시 하나의,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대상 a)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중략) 즉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의 잉여는, 상징계 전체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보증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특정 이름이 생겨나는 ‘현실’적인 사정은, 고유명에 머무는 ‘잉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 된다. 상징계의 구멍을 메워주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이름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유명 하나하나의 잉여를 보증할 터인 순수한 전달과정, 크립키의 신화 또한 상정할 필요가 없다.” (118p 강조 인용자)

 즉 지젝에게 있어서, 상징계의 외부란 상징계의 가장 내부에 머무는 것으로서 상정된다. 그리고 고유명의 단독성을 가정하기 위해, 아즈마는 고유명에 머무는 '잉여'를 우편의 확률적 확산의 효과로서, 즉 '현실'에서 재정의하는데 비해, 애초 ‘현실’도, 우편의 오배가능성이나 커뮤니케이션의 불완전성도 나올 여지조차 없다. 지젝에게 그런것은 애초 단독성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고유명을 사고하는 데에 있어서 ‘현실’의 위상을 관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이상, 시차적 운동이라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의 주위를 왕복하는 운동으로서 행해질 뿐이지, 전달이라는 측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측면이 사실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고유명은 확정기술의 묶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상징계를 특징짓는 시니피앙의 송부送付운동이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이 기능부전, ‘구멍’을 어떻게 기초지을까이다. 지젝은 그것을, 상징계가 품은 괴델적 결정불가능성의 나타남으로서, 즉 상징계의 전체구조에 의해 설명한다. 한편으로 하나의 주체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마주보는 하나의 세계(상징계)가 있다. 이 사이에서의 자기언급적인 入れ子구조가 잉여를 만들어 낸다. 즉 여기서 고유명의 문제는, 주체=세계가 품은 형식적 결정불가능성, 칸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안티노미로써 설명된다. 그러나 크립키의 생각은, 하나의 주체=세계라는 상정 그 자체를 무효화한다. 전달경로라는 이질적 문제계의 도입이, 이 관점 변화를 가능케 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개개의 시니피앙은 실제로는, 여러 전달 경로를 통해 주체의 앞에 배달된다. 시니피앙의 잡다한 집합이 ‘상징계’로서 전체적으로 포착되는 것은, 이들 복수의 전달경로 사이의 차이가 말소됨으로서이다. 지젝이 크립키의 신화를 ‘현실’의 문제로서, 즉 상징계 내부의 문제로서 취한 것은, 이 재해석 속에서는 오히려 지젝 자신의 전도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크립키의 신화는 실은 상징계의 성립 이전, 시니피앙의 집합이 ‘세계’로서 정리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27p)

 이후 아즈마는 고유명의 단독성 문제가 아닌, 그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상정된 커뮤니케이션 문제에 좀 더 천착하며 그곳에서 ‘데리다적 탈구축’을 밝혀나가는 서술을 이어나가면서, 한편으로는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1을 평가하면서도, 탐구 2 이후의 전회를 정말이지 미스터리어스한 것으로서 의구시한다. 아즈마는 결국 가라타니의 단독성을 지젝적인 단독성과 동일한 것으로서, 즉 부정신학으로의 함몰로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말지만, 사실 나는 가라타니의 단독성은 아즈마가 말하는 것과도, 지젝이 말하는 것과도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다. 나는 일단 지금으로서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에 대해서만 생각하려 한다.

4.

 나는 위에서 박가분씨가 사실상 탐구 1적인 비대칭적 커뮤니케이션을 사상해버리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이 말에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니 사실 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박가분씨는 일단은 규칙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타자라든가, 충분히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규칙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그가 강조하면서도, 실은 그가 그것을 별로 그렇지 않은 어딘가에 수렴시키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서술들에 대해서이다. 이를테면 그는 가라타니의 가르치다-배우다라는 비대칭적 관계에서 간과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 속에서 노출되는 타자의 타자성은 ‘가르치겠다-배우겠다’라는 주체의 결의 없이는 경험할 수 없다. (중략) 따라서 타자의 문제를 고찰할 때, 우리는 다시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 ‘타자’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 나’로서 주체가 지닌 ‘단독성’, 즉 가르치고 배우는 ‘장’에 진입하겠다는 주체의 단독적인 ‘결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특수성)과 공동체(=일반성)가 공유하는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저 의지 자체가 단독적인 것이다.” (85p)

 
 단적으로 이는, 가라타니가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가 ‘일상적’이라고 한 것의 의미를 무시하고 있다. 비대칭적인 관계의 장은 ‘의지’로서 진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장으로의 커밋먼트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일상적으로 일어나 버린다. 아즈마 히로키 식으로 말하자면, “그 전달은,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의식과는 완전히 관계가 없다.”(124p) 그렇다면 박가분씨가 말하는 ‘결의’로서만 커밋commit할 수 있는 ‘장’이란 무엇일까? 그건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이 아닌 ‘현실계’가 아닌가? 나는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에게 만약 ‘결의’가 있다면, 그건 이 쪽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지 않을까 이해하지만, 일단 재껴두고 다음 예를 보자.

 “가라타니는 고유명에는 ‘가능 세계’와 빚어지는 차이 속에서 조망되는 ‘현실 세계’의 역사성(=저것이 아닌 이것)이 개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공동체 외부와 맺는 관계 속에서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역사성’을 공동체와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사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역사성이란 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아무리 초월적인 시점을 취해도 그의 공동체 바깥과 맺는 관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데서 드러난다. 이런 역사성은 임의로 형식화될 수 없기 때문에, ‘단독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개별 공동체를 넘어선 역사적 보편성은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 나’의 단독적이고 일회적인 실존과 분리될 수 없다. (중략) 가라타니가 제기한 ‘공동체냐 교통공간이냐’와 같은 구분은 ‘존재망각이냐 존재물음이냐’(하이데거) 또는 ‘허무주의냐 힘에 대한 의지냐’(니체)와 같은 구분의 연장선상에 있다.” (108p 강조 인용자)

 ‘가능 세계’와 빚어지는 차이 속에서 조망되는 ‘현실 세계’의 역사성이란 그대로 ‘상징계’의 빚어지는 차이 속에서 조망되는 ‘현실계’의 역사성으로 번역되며, 개인이 아무리 초월적인 시점을 취해도 그의 공동체 바깥과 맺는 관계를 초월할 수 없다고 그가 말할 때, 가라타니 고진은 공동체와 공동체 바깥이라는 구분을 무화하는 것으로서의 스피노자의 ‘무한’과 그 내재성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완전히 공동체 안과 바깥의 구분을 전제한 체인 닫힌 구체(상징계와 현실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로서 말해지고 있다. 가라타니에게 있어서의 ‘교통공간’이란 공동체냐 교통공간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구분틀 자체를 무화하는 것으로서의 후자이며, 단적으로 이것이 스피노자의 무한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존재망각이냐 존재물음이냐’의 연장선상으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물음’ 또한, 그가 종래의 ‘말하다-듣다’의 차원을 비판하고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전기 데리다적인 것에 머문다. '말하다-듣다‘라는 후설적인 것에 대한 그의 비판은 결국 단 하나의 불가능한 것으로 회귀하며,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닫힌 구체 자체를 강화시켜 버린다. 사실상 지젝적인 구도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교통공간’이라고 말해지지만 전혀 그것은 ‘현실’적인 장을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

 박가분씨는 이어서 ‘가능세계와 연관을 맺는 것으로서의 고유명’을 그대로 다른 것(가능성=타자)과 맺는 관계를 내포한다고 말하며(78p), 사실상 크립키가 말한 가능세계론에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1적인 비대칭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포함시켜 버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미 타자의 이름이 ‘다른 것’으로 치환되고 있을뿐더러, 우리는 이미 아즈마의 존재론적 우편적 독해에서, 가능세계론이 비대칭적 커뮤니케이션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자가 전자를 박살내 버린다는 것을 보았다. 비대칭적 커뮤니케이션의 장은 오히려 크립키가 전달의 순수성을 상정하고야 마는 그 곳에 있다. 오히려 미스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가분씨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가능세계적으로 성립하는 단독성(상징계 속에서 성립하는 대상 a)을 산산조각내 버리는 형태의 ‘교통공간’ 속에서도 가라타니적인 단독성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미스터리이다. 

 박가분씨는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비평으로 접어들기 이전에 가라타니의 반헤겔적인 발언을 인용하며, 이에 대해 반박한다. 일단 헤겔에 대한 가라타니의 비판을 가져와 보겠다.

 “예컨대 헤겔은 본질은 결과 속에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결과’ 속에서 보게 되면 어떤 복수의 계열도 하나의 계열로 보이게 된다. 따라서 헤겔에게 역사는 한 계열이다. 이에 대해 다수성을 주장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복수 계열, 단순하게 말해 두 계열의 독립성은 어디서 확보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이자(二者) 관계에서 쌍방향 혹은 전후에 동시에 설 수 없는 관계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즉 이것이야말로 ‘팔다-사다’라든가 ‘가르치다-배우다’라는 비대칭적인 관계인 것이다.” (탐구2 69p)

 내가 가라타니 고진을 읽는 축으로 아즈마 히로키를 경유한 시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이 말이 그야말로 아즈마 히로키의 지젝 비판과 완전히 싱크로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어떤 복수의 계열도 하나의 계열로 보이게 된다는 것, 즉 ‘불가능한 것’은 라캉이나 지젝에게 있어서 오로지 하나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결과’ 속에서 본 관점이라는 것, 즉 ‘전달과정에서의 불투명성’을 사상한 후에 기능하는 닫힌 구체라는 것, 그리고 이런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전후에 동시에 설 수 없는 비대칭적 관계, 우편적인 것을 들고 와야 한다는 것.

 박가분씨는 이를 이렇게 비판한다.


 “헤겔은 역사적 장소를 특정하는 것이야말로 곤란하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헤겔은 철학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장소를 어떤 구체적인 ‘실체’로 지목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슬라보예 지젝이나 마르쿠스 가브리엘처럼 ”실체는 동시에 주체로서 사고해야 한다“는 헤겔의 명제에 주목해야 한다.”(112p)

 어떤 구체적인 ‘실체’로 지목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한다는 것, 바꿔 말하면, ‘현실’이 아닌 ‘현실계’적인 측면에서만 단독성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는 것. 또한, 실체란 동시에 ‘주체’로서 사고해야 한다는 것. 애초 단독성의 근거는 처음부터 ‘현실계’에서 찾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크립키적인, 유통과정에 노출된 것으로서의 고유명을, 어디까지나 상징계에 대한 것으로서의 주체로서 사고해 버리는 것. 여기의 어디에 탐구 1적인 교통공간이 존재한단 말인가? 박가분씨는 헤겔이 말하는 주체로서의 실체를 가라타니가 말하는 ‘교통공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112p) 여기서 이미, 가라타니적 교통 공간이 가지는 비대칭성은 완전히 닫힌 구체의 내부로서 편입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 단계에서, 내가 보기에 박가분씨의 부정신학화는 너무나도 완연하다. 하지만 박가분씨 자신은 가라타니가 말한 ‘트랜스크리틱’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서 그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반대로, 박가분씨가 보기에 부정신학화하는 것은 (박가분씨가 말하는 의미에서) 충분히 트랜스크리틱하지 못한 가라타니 고진이 된다. 그리고 사실상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이후의 전개는 ‘충분히 트랜스크리틱하지 못한’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나름의 평가와 비판들로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한번 살펴보고 싶다.

5.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에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말들을 간단히 요약해가면서, 박가분씨의 이해에 대한 몇 가지 이의점들을 말해보고자 한다. 가라타니는 종래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을 완전히 반성적인 자기의식, 후설적인 코기토, 즉 바꾸어말하면 괴델의 불확정성 정리로부터 나온 단독성으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은 ‘일반적인 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트랜스크리틱>에서 돌연 초월론적 통각을 ‘일반적인 나’가 아닌 ‘단독자’로서 재평가한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칸트의 물자체를 새롭게 정의내리면서이다. 그는 물자체=타자를 ‘시차’=통역불가능한 두 시스템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이는 비대칭적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차이를 의미한다) 칸트가 이를 ‘이율배반’이라는 용어로서 재개념화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가라타니는 종래 칸트를 괴델적인 문제의식 하에서 대상 a를 끌어냈다고 보고 비판하고 있었지만, 실은 칸트가 괴델적인 문제계를 벗어난 것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공간(탐구1적인)에서 사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버렸던 것이다. 여하간 여기서는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익숙한 (하지만 여전히 불가사의한) 쌍이 있다. 가라타니는 놀랍게도 통역불가능한 시스템 사이의 차이들로부터 ‘단독자’를 도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추동하는 것으로서, 바로 물자체=초월론적 가상을 가져온다. 즉 가라타니는 종래의 미스터리했던 ‘비약’을 추동한 것으로서 초월론적 가상을 끌고 온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스피노자적인 무한과 그곳에서부터 ‘단독자로서의 고유명’의 인식을 이끌어내는 것으로서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거할 수 없는, 무리하게 제거한다 해도 다른 형태로 재현되어버리는 어떤 가상”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것은 무엇인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일단 이에 대해 박가분씨는 어떤 식으로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방금 전까지 내가 말했듯이, 박가분씨는 단독자를 대상 a로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세계(=주체)로서 받아들여 이해한다. 그렇다면 <트랜스크리틱>에 이르러 가라타니가 새롭게 가져온 차원, 초월론적 가상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타자가 초월론적으로 발견된다는 것과 타자가 일상적이고 흔한 존재라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추상 수준의 차이가 존재한다. 가령 공동체 바깥의 타자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주체에게 어떤 초월론적 전회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타자와 더불어서 그와 같은 타자에게서 발견되고 재음미되는 타자성을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140p)

 그는 가라타니가 말하는 초월론적 가상의 위치를 “불분명”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초월론적 가상의 위치는 일단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가라타니에게 있어서 초월론적 가상이란 그의 초기 문학 비평에서 보이는 '자연'의 기묘한 변주가 아닌가? 가라타니에게 초월론적 가상은 구별할 수 있는 것 이전에 결코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조차 없는, 중층결정론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 '자연'을 앞에 두고 구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뭐 여하튼, “초월론적 통각과 초월론적 가상 사이의 구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도 박가분씨는 지젝의 말을 빌어 지적한다. 구체적인 건,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DUr&fldid=ExU&datanum=10369&openArticle=true&docid=3506894990&q=%BD%BD%B6%F3%BA%B8%BF%B9%20%C1%F6%C1%A7&re=1 을 참고하길 원하지만, 일단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서의 가라타니 비판문을 가져와 보자.

 “초월론적 주체의 정확한 위치는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이나 마르크스가 사유의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형식이라고 부른 것의 위상이 아니다. 우선 초월론적 나, 그 순수한 통각은 본체적이지도 현상적이지도 않은, 전적으로 형식적인 기능이다. 그것은 비어 있으며 어떠한 현상적 직관도 그에 상응하지 않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나타나야 한다면 그러한 자기-출현은 "물자체" 즉 본체의 직접적인 자기-투명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초월론적 주체의 공백($)과 우리의 지각의 원인이 되는 접근 불가능한 X, 초월론적 대상의 공백 사이의 비교가 잘못 이해되었다: 초월론적 대상은 현상의 외양(appearance) 너머에 있는 공백인 반면 초월론적 주체는 현상 속에 이미 공백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몇 년 전의 박가분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물론 우리는 주체성의 존재에 대해 경험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 혹은 그것의 자발성이 실제적인 게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것은 결코 불가피한 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지젝은 '주체'와 그것의 '자유'를 엄밀히 '존재론적인' '사건'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지젝이 하이데거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필수적인 개념적 구분, 즉 '존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차이'는 바로 이 '주체'의 초월론적 위상을 포착하는 데 핵심적이다.”


 지젝이 전적으로 형식적인 기능으로서의 초월론적 통각을 말할 때, 그것은 그의 대상 a론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본체적이라는 것은 현실계의 표현이라고 생각되며, 현상적이라는 것은 상징계를 의미한다고 봐도 좋다면, 물자체라는 것은 “본체의 직접적인 자기-투명성”, “현상의 외양(appearance) 너머에 있는 공백”이다. 즉 지젝에 있어서 초월론적 통각이란 대상a를 의미하며, 물자체라는 것은 현실계의 직접적인 공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둘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박가분씨는 초월론적 통각의 차원을 초월론적 가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며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를 들고 와 이를 부연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이러저러하게 말할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정리한다면, 가라타니의 초월론적 가상은 애초 오류라 해석되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초월론적 가상은 그들이 종래 깔고 있던 구도를 혼동시키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지고, 배제될 뿐이다. 이는 내게 있어서는 ‘현실’적인 것, ‘세속’적인 것의 배제에 기인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일까? 이를 위해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208페이지의 ‘정말로 트랜스크리틱한가?’ 라는 절을 중심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박가분씨에 의하면,

 “<트랜스크리틱>을 조망하면서 독자는 이렇게 질문할 법하다. 그의 방법은 정말로 트랜스크리틱한가? (중략) 트랜스크리틱의 비일관성, 즉 사전과 사후의 ‘시차’를 통해 사태를 보기보다는 오히려 사전 혹은 사후의 시점에 고착되어서 사태를 바라보는 문제는, 가라타니가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해석하는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보았듯이 가라타니는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을 ‘사후적으로만 타당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반대로 그의 가치형태론은 교환을 사전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데서 도출되는 것처럼 간주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교환의 사전과 사후를 오감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210p)

 이보다 앞선 가라타니의 마르크스론에 대한 박가분씨의 비판도 인용해 보겠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개념의 혼동을 범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가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복수의 시스템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며, 그것을 나중에 복수의 ‘가치체게’라고 바꿔 말한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추상노동으로서 상품의 가치는 복수의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가격체계를 경향적으로 규율한다. 현실의 가격은 가치를 중심으로 변동을 거듭한다. 그런데 가라타니는 어느 순간 복수의 가격체계를 복수의 가치체계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가치가 상대적인 가격체계들을 넘어서 있다는 진술과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상품가치가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우연한 상품가격과 다르기 위해서는, 가치가 단일한 가치체계로 존재해야 한다.” (180p)

 간단히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박가분씨는 예컨대 노동가치설과 가치형태론 사이를 ‘오고감’을 트랜스크리틱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가라타니는 이 ‘오고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애초 위상적인 부분에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더 쉽게 바꿔 말하자면 이렇다. 박가분씨에게 있어서 노동가치설은 초월론적 통각=대상 a이며, 가치형태론은 가능세계=상징계이다. 또 대상 a를 타당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은 사후적인 시점에서이며, 상징계는 사전의 시점에서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사전과 사후 사이의 운동이 박가분씨에게 있어서는 트랜스크리틱이다. 그러나 가라타니는 정말 그런 식으로 이해했던 것일까? 박가분씨는 가라타니가 마르크스를 노동가치설이 사후적으로 타당하다고 했다고 한 것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라타니가 노동가치설을 실상 둘로 나누고 있음을 무시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스미스나 리카도가 노동가치설을 포기, 수정한 것에 대해 오히려 그들 이상으로 노동가치설을 고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고전파가 단일 시스템에서 성립하는 균형가격을 노동가치로 치환했을 뿐인 데 비해, 마르크스는 복수 시스템에서 출발하고 그 때문에 사회적, 추상적인 노동가치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탐구 384p)

 박가분씨는 어디까지나 닫힌 구체 내의 대상 a로서 노동가치설을 생각한다. 하지만 가라타니에게 있어서 노동가치설이란 상징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독자라는 것이 애초 존재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가르치다-배우다라는 비대칭적 교통공간 속에서 도출되어 나와버린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박가분씨는 이 장의 존재 그 자체를 눈치채지 못한 듯 보인다. 따라서 ‘복수의 가격체계는 있어도 복수의 가치체계는 있을 수 없다.’고 논박한다. 그러나 가라타니는 바로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 지점이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실감 속에서만 생각했다. 다름 아닌 그런 세계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한 것”(탐구2)이라고 가라타니는 생각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노동가치’라는 것을 굳이 필사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앞서 말했듯이 종래의 대상 a적인 것이 성립하는 시스템에서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단일시스템을 무근거하게 만들어버리는 공간 속에서 다시 ‘단독자’를 사고해야만 했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내가 느끼기에, 정말이지 그 무엇보다도 실존적인 문제이다. 이를 단순한 대상 a론으로서만 받아들인다면, 실은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이는 박가분씨가 ‘가치체계의 시간적인 차이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전성이 전제는 시간적인 어긋남을 무화하면서 성립하는 반면, “현전성의 탈아는 복수의 시간적 순서의 충돌에 의해서 생겨”(존재론적 우편적 178p)나는 것이 아닌가.

“불가능한 것은 복수가 있다, 고 나는 서술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불가능한 것, 비세계적인 존재 그 자체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비세계적인 효과가 존재하고,  그것은 개개의 정보가 가지는 속도의 어긋남에 의해, 일상적으로 복수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하이데거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것’을 단수로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 그가 세계라는 단일성 그 자체를 미세하게 요동시키는 효과, 우리들의 여기서의 언어를 사용하자면 ‘속도의 충돌’을 말소하고 논하고 있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소는 또한, 제 2장에서 검토했던 라캉(지젝)의 행동거지, 상징계 전체를 포착하기 위해 개개의 시니피앙이 잘못 배달될 가능성을 말소한 것과 비견될 만하다.” (존재론적 우편적 180p 강조 인용자)


6.

 나는 아마도, 여기서의 아즈마적인 반박을 끝으로 이 글을 끝낼 수 있다. 나는 박가분씨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장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그리고 아즈마식으로 ‘유령적 목소리’로서의 타자란 단순히 상징계 내부로 수렴되어 잊혀지고, 무시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글은 아마 여기서 끝내면 된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이라는 책은 이후로도 얼마든지 박진감있게 전개되지만, 사실상 이후의 논의들은 경제학적인 논의건 뭐건 전부 여기까지의 이론적 바탕에서 접근할 수 있다. 즉, 구태여 내가 뭐라 사례를 조목조목 들어 더 비판해 봐야 쪼잔하게만 느껴진달까, 그닥 의욕이 생겨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로도 제 자신이 상당히 쪼잔했다고 생각하므로, 만약 박가분씨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부디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로 제가 아직까지 애인 없이 눈물 흘리고 있다든가 어디선가 모 염장글을 보았기 때문임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하튼지간에, 여기서, 이제와서 내가 해버리고 싶은 것은, 물론 버겁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대체 가라타니 고진에게 있어서 고유명=단독자란 무엇이며, 무한이란 무엇이고, 타자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일지라는 의문에 답하는 것이다. 박가분씨에게 있어서 단독자란 대상 a이며, 무한이란 상징계이고, 타자란 현실계 자체의 공백이다. 트랜스크리틱이란 상징계와 현실계를 벗어나지 않는 차원의 왕복이다. 또 아즈마에게 있어서는 단독자란 산종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다의성으로의 수렴=전이이며, 무한이란 우편적 커뮤니케이션, 타자란 우편적 커뮤니케이션에서 분할된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목소리’이며, ‘유령’을 의미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가라타니적인 트랜스크리틱은 박가분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좀 웃긴 점은, 아즈마나 박가분씨나 가라타니에 대한 독해에 대해서만큼은 결국은 똑같은 방향성에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가라타니는 이 둘 중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 가라타니는 이 둘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이제껏 아즈마적인 우편공간, <잘못 쓰여질 가능성이 있는> 확률성이 지배하는 세계를 곧 가라타니적인 ‘비대칭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교통공간’으로서 서술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다르다. 박가분씨적인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맥락에서는 둘은 같은 것으로 치부되어도 상관없지만, 역시 이 둘은 다른 것이다. 이것이 왜 다른지의 단초는 가라타니가 말하는 스피노자적인 ‘무한’에 대한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아즈마에게 있어서 ‘무한’은 복수의 효과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반면 박가분씨에게 있어서 ‘무한’은 닫힌 구체, 상징계적인 것과, 그 직중에 대상 a가 있는 것으로서 이미지된다. 즉 박가분씨에게 무한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결국 하나라고 말해도 좋지 않은가. 반면 스피노자의 ‘신=무한’은 ‘하나도 복수도 아닌’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신은 복수도 단수도 아닌 무한으로서의 실체이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가假무한이 아닌 실實무한개념에 기초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즉 스피노자의 ‘신’은 가무한, 유한한 부분의 결집인 ‘샐 수 있는’ 복수가 아니다. 동시에 스피노자의 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무한’이기 때문에, ‘단수’ 또한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1에서 커뮤니케이션론에 대해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데리다적인 것과는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있다. 또한 그는 저서 전체에 있어서 라캉이 나올 부분에 라캉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라캉 대신 프로이트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각각 ‘복수’적인 것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는 것에, 그리고 ‘단수’적인 것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는 것 둘 다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데리다에 대해서라면 어떤가. 데리다적인 것은 그것이 커뮤니케이션론이라고 해도 ‘쓰이는’ 것이다. 즉 이것은 ‘쓰이는’ 순간 ‘샐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단적으로 이 ‘샐 수 있음’을 아즈마는 ‘확률론적’ 이라고 형용한다. 반면 가라타니의 ‘무한’은 확률론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무한’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복수가 아니다. 동시에 단수 또한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 무한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며 세계를 덮어 버린다. 지금 나는 뭔가 대단히 형이상학적인 ‘무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별로 그렇지 않다. ‘실무한’의 개념을 가라타니는 바로 ‘지구’라는 구면모델에서 가져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에게 있어서 ‘단수’로서의, 그리고 ‘복수’로서의 불가능한 것=세계란 곧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박가분씨도 아즈마 히로키도 가라타니적인 ‘무한’에 대해서라면 다분히 ‘표상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히려 형이상학적인 것은 가라타니의 세계인식이 아니라, 박가분씨와 아즈마 히로키의 그것이다. 중층적(=이율배반적) 결정(=단독적 개인)이라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것이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경우는 중층적(=이율배반적) 비결정(=비 단독적 개인)이 되어버리며, 이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반드시 ‘쓰여진 것’, ‘매체’를 한번 거친 것으로서의 문제로서만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확률론적이 아니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또한 박가분씨의 경우는 비중층적(=비 이율배반적) 결정(=특수적 개인)이라 생각되며, 사실 내게 있어서는 그닥 특별한 관점은 아니랄까, 사실 이 둘은 각각 가라타니가 말하는 자연-생성적인 것과 체계적인 것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바꿔말하면 아즈마는 라이프니츠적인 것에, 박가분씨는 헤겔적인 것에 각각 대응한다. (가라타니가 <문자의 지정학>에서, 자연-생성적인 것이 지배하는 요샛말로는 ‘나쁜 장소’(사와라기 노이)적인 일본을 말하고 동시에 극도로 <체계적인> 것이 지배하는 장소로서의 한국을 말한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잘 맞는다.)

 이에 대해 가라타니적인 무한은 박가분씨의 것에도 아즈마의 것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그야말로 사이에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흔한’ 것이며 세계를 닫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가라타니에 따르면 별로 신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한 것”이며, “무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적 실존이 가능한 것”이다. 가라타니는 <에티카>의 독자들을 좌절시키는 것이 스피노자가 <에티카>의 시작부터 <신>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해버린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119p) 아마 박가분씨도 아즈마도 이 문장의 의미심장함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고 그를 읽고 있다. 그러나 가라타니가 말하는 ‘외부적 실존’으로서의 단독자라는 것은, 이런 세계인식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단독자-보편성의 쌍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또 다른 단독자로서의 타자, 분명히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상 a로서 환원되지 않고, 동시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정가능성의 늪에 빠지지 않는 타자이며, 이런 타자를 ‘규제적 이념’으로서 인식할 때, 가라타니의 ‘사상’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트랜스크리틱’이란, 아즈마나 박가분씨가 이해하는 것처럼 상징계와 현실계의 틀 속에서의 왕복이 아니며, ‘규제적 이념’에 추동되는 형태로 아즈마적인 우편공간을 괄호치고, 그러면서도 지젝적인 체계 또한 괄호쳐 나가면서 그 어느 쪽에도 수렴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외부적 실존- 단독자를 발견해나가는 운동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7.

 아마 나는 6 부분이 특히나 자신이 없다.

 신나게 잘난 듯 써놓고 정말이지 웃긴 말이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일단 가라타니의 무한이 박가분씨의 그것이나 아즈마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둘 어느 쪽에도 결코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 ‘까지는’ 나도 그럭저럭 알 것 같다. 하지만 그 후는 내가 써놓고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대책이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저렇게 잘난 듯 써논 말과는 다르게, 사실 난 뭔가 직감적인 차원에서, 아니 솔직히 이런 말 하면 완전히 NG라고는 생각하지만 에로게 플레이어적으로 가라타니적인 타자관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은 내 최소한의 정직함과 인간적인 양심을 걸고 반드시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가라타니 고진을, 내 가라타니쨔응(...)을 구하고 싶었다.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무리겠지만, 어떻게든 시도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고, 이 글은 전적으로 그런 충동 하에서 쓰여지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썼던 것 중에, 어디서 봤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성경의 욥기 관련 내용이 있었다. 욥은 신한테 아내도 빼앗기고 자식들도 빼앗긴다. 나중에 신이 다시 아내와 자식들을 주었다. 물론 후자는 결코 전자와 동일하지 않다. 아내 이름이 나기사고 자식 이름이 우시오라 해보자. 상실된 것은 다름 아닌 나기사고 다름 아닌 우시오인 것이며, 신이 다른 히로인을 주고 다른 자식들을 주어봐야 결코 내 상실감이 채워지는 일은 없다. 가라타니는 단독자로서 나기사와 우시오를 보고, 이 둘의 상실을 결코 ‘대체불가능한’ 것으로서 말한다. 난 이 글에 심정적으로 극히 공감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가분씨라면, 적어도 내가 읽은 박가분은, 물론 그가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이지 미안해 죽을 일이지만, 일단은 나기사도 우시오도 대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역사적 장소를 어떤 구체적인 ‘실체’로 지목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할 것이며, “실체는 동시에 주체로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즉 나기사도 우시오도, 그 이름, 구체적인 ‘실체’로서 지목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로서, 상징계의 직중에 빈 결락으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바꿔 말하자면, 내가 구하지 못한 것이 ‘나기사’나 ‘우시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내가 구하지 못한 것이 가지는 상징계 내의 위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이름’이 아니라 대상 a로서의 주체의 위상인 것이며, 사실 굳이 나기사나 우시오가 아니라도, 그것이 대상 a적인 위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바꿔말하자면, 이 둘의 죽음에 어떤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위상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내 상실감이 절대적인 것인지도 그런 위상에서 나와야하는 건지도 잘 모를 뿐더러, 내 상실감은 그런걸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될 순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난 진정한 나기사도 우시오도 결국 구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나기사와 우시오였기 때문에 난 절망하고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아즈마 히로키라면 뭐라고 말할까? 예전 그가 비슷한 주제에 대해, ‘잃어버린 아이는 대체가능하다’고 니코 생방송에서 말했던 걸 마토메로 읽은 기억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나기사라는 것’, ‘우시오라는 것’은 중요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대상 a적인 것으로 수렴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이름=고유명이 정말이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고유명은 항상 시간적인 차이화에 의한 정정가능성에 노출된다. 그는 고유명의 단독성을 그런 비대칭성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다시 정의내린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엄밀히 말해 다름 아닌 나기사와 우시오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죽었다는 나기사와 우시오가 사실 그 둘이 아닌 다른 누군가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독성 그 자체가 아니라 단독성이라는 '환상'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에크리튀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바꿔 말하자면, 그 둘의 죽음에 어떤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실은 ‘확률적’이며, 그 확률의 감촉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유령적인 것, 타자적인 것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한다. 중요한 것은 고유명의 잉여가 아니며, 그것의 에크리튀르화인 것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유령적인 것들’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그는 결코 단독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대체가능했다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므로. 따라서 그는 AIR 비평에서는 전승을 이야기하고, 세카이계에 대한 단행본에서는 더 나아가 ‘생식’과 ‘출산’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난 이 또한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아즈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독성’의 강조는 결국 위의 박가분씨적인 단독성의 절대화와 그에 따른 괴델적인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빠지지 않는 형태의 나기사도, 우시오도 분명히 있다고, 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아즈마는 그런게 어디있냐, 그럼에도 나기사도 우시오도 어찌됐든 사후적으로 정정가능성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또한 그럼에도 너가 단독성을 말하려는것 자체가 산종에서 다의성으로의 전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할 만 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가까스로 존재론적 우편적을 멈추었으니.) 하지만 난 그것이 전이라는 것을 설사 인정하더라도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가라타니 식으로 말하자면,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다름아닌 나기사와 우시오’라는 존재가 나를 그럴 수밖에 없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결코 확률적 감촉 안에서 그 둘을 대체가능한 무언가로서 바라볼 수 없다. 가라타니 고진은 ‘규제적 이념’은 결코 제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다름 아닌 나기사와 우시오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 마음은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절대로 할 수 없다. 환상이고 다의성이로의 전이고 뭐고, 이들이 ‘대체가능’하다는 것 따위 결단코 말할 수 없다. 절대로.

 이 나기사를, 이 우시오를 구하고 싶었다는 것. 책 제목대로라면,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충동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하루종일 밥도 안먹고 여기까지 참 잘도 밀어붙였구나 싶다. 지치니까 여기까지 해야겠다. 혹시라도 이 긴 글을 다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14년 5월 11일 새벽
호무라가 마도카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며


덧글

  • DonaDona 2014/05/12 16:18 # 답글

    ...아는 게 없으니 읽어도 이해하지 못함이렸다... OTL
  • 박가분 2014/05/26 01:38 # 삭제 답글

    뭔가에 쫓기듯이 쓴 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래서 안타깝고 연민이 듭니다.
  • 행인 2014/06/01 00:30 # 삭제 답글

    가라타니는 전혀 레닌적이지 않은데,
    가라타니를 레닌적 방법(나아가서는 지젝, 라캉, 헤겔적)으로
    해석하는 박가분의 논지는 분명 문제가 많지요.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헤겔을 넘어서려는 가라타니에게 다가가서 그의 발목을 붙잡고 "레닌과 헤겔의 이름으로 그들을 넘어서려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외침으로 들린다랄까...ㅎㅎ
    그런점에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필자의 결론에는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앞으로 자주 들리게 되겠네요ㅎㅎ
  • kurame 2014/06/13 21:32 #

    감사합니다.
    근데 자주 들르셔도 제가 글을 하도 안 써서(...) 별로 건지실건 없으실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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