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


2015/04/07 04:02

사생문적 인식과 연애 - (2) 번역

2.

 그런데, 자신은 "울지 않으면서 울고 있는 다른 이에 대해 쓰는" 것이 사생문 작가라 한다면, 소세키도 사생문 작가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도 울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생문 작가는 단순히 방관자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나 「풀베게」에서 별로였던 점은, 결국 사생문 작가는 울지 않는다는 것(‘초연히’ 있는 것)에 있었다. ‘혁신적 지사의 뜨거움’이라는 결의를 이곳에서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곤란한 과제이다. 사생문적 태도란, 단순히 여유를 가지고 현실을 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태도를 "여유"라고 부르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는 스스로 그 여유를 잃을 일이 있고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듯한 여유인 것이다. 가라타니는 프로이트의 논문 「유머」를 참조하면서, 사생문적 태도란 "대상을 뿌리친 상태로 보지만, 어딘가 애정을 가진 채 그렇게 하는” 태도이며, 오브젝트 레벨과 함께 메타레벨에 선다는 ‘자기이중화’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기모순에 머무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인용 논문에서 바흐친은 알료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의 제 1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겐 이 목소리는 정말 진심이며, 그것이 알료샤에게 이반을 변호하는 근거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다.” 알료샤는 이반의 언어를 이중으로, 즉 “죽이지 말라"와 동시에 “죽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이반의 발화의 폴리포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그는 이반에 대한 태도가 둘로 찢기는 것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알료샤의 자기모순만이 스메르쟈코프에 의해 쫒기던 이반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만이 이반에게 “오빠, 당신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생문적 인식의 자기 모순이다. 또 이것이 기묘한 「애정」의 가능성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생문적 인식에 의한 창작이란, 본래라면 한편으로는 ‘우는(연애하는)’ 주인공들을 설정하면서, 그것과 동시에 그 연애를 탈구축하는 듯한 인식도 제시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주요 레벨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산시로」가 이 과제에 답해 쓰여졌다는 것은 이미 썼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복수의 레벨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는 쓰는 측, 이 때 이미 ‘우는’ 레벨을 소거해버린 것이 아닐까. ‘우는(연애하는)’ 것이란, 자신의 '우는’ 위상만을 특권화하는 것, 즉 ‘우는’것을 탈구축해 버리는 인식을 소거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작가는 항상 주인공에 대해 ‘여유’을 가지고 있다고 바흐친은 말했지만(「작가와 주인공」), ‘우는’ 주인공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에크리튀르의 여유를 제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생문적 인식이 연애하는 주인공의 레벨보다도 우위에 서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독자와 작가의 사생문적 인식과 공명하며, 주인공의 연애를 상위에서 내려다보는 식이 되어버린다. 그곳에서 ‘연애’는 없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사생문적 인식이 아니다. 그 때문에 연애를 사생문적 인식에 의해 그린다는 행위는, 실은 오히려 “연애를 사생문적으로 포착하는 것”을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연애’란 단수의 레벨밖에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연애’를 사생문적 인식에 의해 포착하려는 것은, 불가피하게 사생문을 방기하는 것을 또한 의미하게 될 것이다. 사생문이란 복수 레벨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생문적 인식을 거부하는 것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을 때, 사생문 작가는 자기모순에 빠져버린다. 

 「산시로」는 분명히, 산시로와 미네코의 연애를 사생문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곳에서 내면묘사는 불가능해진다. 내면묘사는 발화의 폴리포니를 소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미네코 자신’이 잡을 수 없는 무언가인 것처럼, 산시로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적어도 소세키는 그 ‘내면’을 창작 과정에 있어서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인물이 연애의 주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실제 우리들은 특히 「그 후」와 비교했을 때, 이 소설(「산시로」)이 연애에 대해서 담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사생문의 소행인 것이다. 즉 「산시로」의 에크리튀르는 정말이지 사생문스러웠지만, 그 때문에 사생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진짜' 사생문은 연애의 열성 또한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 이후의 작품은 이 더블 바인드에서 시작된다. 우리들은 여기에서야말로, 언문일치와 서양 근대문학에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던 소세키가, 「그 후」 이후 굳이 ‘근대문학’을 쓰기 시작했던 이유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에토 준에 의하면, 「그 후」에서 소세키는 근대화하는 동 세대에의 혐오감을 반근대(전근대)적인 말투에 실은 작풍으로부터, ‘근대인의 고독’을 그리는 작풍으로 변했다고 말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통저通低하고 있다. 비근대/근대의 이항대립에서 전자가 풍요롭고 후자가 빈곤하며, 소세키는 에도 문학과 한학에 교양을 가지고 전자에 속해 있었으며, 그 때문에 그는 근대 비판으로서 그런 평론이나 문학을 생산했다. 이것은 알기 쉽지만 꽤나 단순한 독해이다. 비슷한 이항대립적 도식은 일견 다르게 보이는 비평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쓰미 시게히코는 「二個の者がsame spaceヲoccupyスル訳には行かぬ」라는 단편에 주목하여, 서양 독특의 배제와 선별의 체계를 소세키는 야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고 논하고 있다. 하쓰미에 의하면, 「그 후」이후의 작품은 여성을 맴도는 "배제와 선별의 체계를 일단 빠져나왔던 자가, 배제도 선별도 기능하지 않는 장을 몽상해나가며 그 자신의 행위를 반추하기를 계속하는 곤란한 과정을 밟고 있다" (「반=일본어론」). 다른 의장을 취하고 있다 할지라도, 독해의 대략적 개요는 에토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물론 이들 독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곳에서는 가장 곤란한 물음이 피해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즉 그것은, 왜 애초 “배제와 선별의 논리를 일단 빠져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이 무시되고서야 처음으로 ‘근대’란 하나의 ‘제도’이자 ‘폭력’이며 소세키는 그것을 발견했다, 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세기 전환기의 일본에 살았던 소세키에게 있어서, ‘근대’, ‘서양’은 단순한 제도로서 보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현대 일본의 개화」에 있어서 소케키는 ‘외발적’인 근대화를 비판하고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내발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근대화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메이지기에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이 감각은 당연하다. ‘근대’에의 감각은 두가지로 분열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근대화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일까. 문학의 문제로 말하자면, 왜 ‘언문일치’는 하나의 제도이면서도, 그토록 강력했던 것일까. 왜 「행인」의 일부는, 그렇게까지 ‘연애’에 애를 태웠던 걸까. 소세키가 「그 후」 이후 풀고 싶었던 것은 이 문제이며, 그것은 결코 “배제도 선별도 기능하지 않는 장”을 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분명 작품들은 ‘근대인의 고독’과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그리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고독’을 그리려 했던 소세키의 기도企図를 오해하면 안 된다. 그는 ‘근대’의 제도성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며, (오히려 소세키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척이나 자명한 것이었다) 그것의필연성이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어째서 일본이 ‘근대화’하는 건지를 묻고 있었다. 

 연애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그 연애 또한 ‘사생’하고자 하는 사생문적 인식은 자기모순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이후의 소세키의 시도는 사생문적 인식 속에서 어떻게 ‘열성熱誠’을 그릴까라는 과제에 대해서였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있어서, 소세키는 사생문적 인식과 연애를 분명히 대치시키고 있다. (반복해서 확인해두지만, 본래 ‘사생문적 인식’이란 반드시 사랑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이스케는 당초 사생문적 인식을 가지고, 연애를 상시 탈구축해 버린다. 예를 들자면, 그는 유행하고 있는 연애소설에 대해 미심쩍은 생각을 갖고 있다. 다이스케가 신경쓰이는 것은, 그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연애’의 레벨에 있어서만 행동하도록 설정되어 있고, 사회적 관련성 속에서 필연적으로 부유하는 별종의 레벨이 완전히 간과되어 있다는 점이다. “「단운치오」의 주인공은 모두 돈에 구애받지 않는 남자들이니깐 사치스러운 생활 속에서 그런 허튼 짓을 한다 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매연」의 주인공은 그럴 여지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 (중략) 아, 그런 경우에 처해서, 그런 일을 단행할 수 있는 주인공은, 아마도 불안 따위 없겠지." 그 때문에 그는 가도노처럼 단순히 감탄할 수가 없다. 이는 연애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이스케는 신문기사 하나를 보아도, 일일이 그 별종의 레벨의 의미를 생각해고 만다. 학교 분규에 대한 오쿠마의 학생 측에 선 논설을 읽어도, “오쿠마가 학생들을 와세다 대학교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 해석한다. 하나하나의 사건에 대해 복수의 레벨의 독해를 하고 만다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불안’이다. 이는 사회를 비스듬히 보는 것과는 다르다. 다이스케가 실사회에서 살고 있는 옛 친구 히라오카를 오히려 ‘아이 취급’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실사회를 경멸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히라오카와의 대화에서, 다이스케는 ‘유민’ 대 ‘실사회’ ‘머리’ 대 ‘현실’ 같은 이분법을 일관되게 싫어한다. 그것을 단순히 자기 변호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실업의 세계는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하지만, 자신의 세계가 실업만으로 되어버린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다. 히라오카는 단수의 세계에만 속해 있다. 다이스케는, 복수의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자신의 자유야말로 값진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물론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고등유민"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사생문적 인식이 다이스케의 연애를 방해하는 것은, 우선 세가지 문제에 있어서이다. 첫번째는 다이스케 자신의 ‘내면’적 일관성의 문제이다. 고등유민으로서 ‘여러 미의 종류에 접촉해서’ 감수성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다이스케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지금 세상에 입에 담는 것을 위선가의 제 1위에 둔”다. 그는 미치요에 대해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자각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현재적’인 것으로서만 생각하고, 또 그는 그 유보를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갱부」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책임을 가질 수 없다. 두번째는, 행동의 순수성에 대한 의식, 즉 미학의 문제이다. 히라오카와의 회화에서 다이스케는,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은 성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성실한 일은 항시 자기목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연애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연애는, 연애하는 자신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순수한 연애는 기생놀음에서야 말로 달성된다. 미치요를 손에 넣기 위한 연애는, 미치요를 손에 넣은(빵을 얻은) 후에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두 사람의 연애의 기원의 문제이다. 다이스케가 강하게 미치요를 원하는 것은, 물론 그녀가 이미 히라오카의 처이기 때문이다. 삼각관계에 있어서 흔한 욕망이 도식이 그곳에는 있다. 다이스케 자신이 그런 것을 자각하고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있고, 다이스케의 연애(열성熱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삼각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연애는 ‘현재적’인 것이고, 또한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다이스케의 이동은 이 세 가지 문제영역에 있어서 동시에 일어난다. 그 이동이 일어나는 것은 13장에서이다. 그곳에서 다이스케는 자신과 미치요와의 관계를 ‘천의天意’라 형용하며, 다음 장의 모두는 “자연의 아이가 될 것인가,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라고 다이스케는 망설였다.” 로 시작된다. 여기서는 이미, 히라오카의 존재나 자신의 맞선 얘기는 둘의 ‘자연’에 대한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의지 대 자연, 제도 대 자연이라는 대립도식은, 다이스케의 사생문적 인식이 은폐된 후에야 생겨난다. 「그 후」에 있어서 주의해야할 점은 이 은폐인 것이다.

 다이스케는 어째서 미치요와의 ‘열성’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인가. 미치요와 상대해가며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때 비로소, 다이스케는 더 이상 오래 미치요와 마주 앉아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그는 평소 서양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속에 나오는 남녀간의 정담이 너무 노골적이고 문란한데다 직선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원어로 읽는다면 또 몰라도, 일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문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미치요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서양식의 대화를 끌어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는 평범한 말로도 충분히 뜻이 통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갑의 위치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을의 위치로 미끄러져 들어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기술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미네코의 대사와 마찬가지로, 미치요의 대사 또한 이중성으로 채워져 있다. 연애의 언설을 그 자체로서 생각하는 서양의 ‘정담’과는 다르게, 다이스케와 미치요 사이의 회화는 ‘평범한 언어’로서 행해진다. 그 때문에 그 회화는 항상, 단순히 사무적인 것인지 연애의 언설인지 판정하기 힘들다. 전 절에서 서술했듯이, 산시로는 이 미결정성 때문에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후」에서는 이 사정이 역이 된다. 다이스케는 그야말로 이 미결정성 때문에, 연애에 빨려들어가고 만다. 이반이 어느 샌가 ‘죽여’라고 말해버린 것처럼, 다이스케는 어느 샌가 미치요와의 사이에서 연애의 언어를 교환하게 되어버리고 있다. 아마도 미치요에게 있어서도 사정은 동일하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그야말로 그 후에, 자신들이 연애하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런데 다이스케는 그 이중성을 소거하려고 한다. 이반은, “죽이지 마”라는 단계에서 동시에 두가지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비슷하게, 다이스케와 미치요는 실제로는 사무적이면서 동시에 유혹적인 듯한 회화를 했던 것이다. 그 때 그들은 결코, 숨겨진 연정을 "무의식에" 담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미 서술했듯이, 이 같은 인식은 원근법적 도착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가 열렬한 연애소설로서 나타난 것은, 그야말로 이 원근법적 도착을 채용한 것에 의해서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폴리포니로서 있었던 것이, 사후적으로 연애의 언어로서 모노포니화한다. 그런 식으로 처음으로, 다이스케는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다”라는 자기확인이 가능하다. 이미 미치요에 대한 사랑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다. 실은 이제까지도 연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그 때 연애의 언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는 회로가 만들어지는 것에 의해, 표면상의 「갱부」적 의식보다도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의 동일성이 신빙된다. “지금까지는 아버지나 형수를 상대할 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부드럽게 자아를 관철시켰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자아를 관철시킬 수 없게 되었다. [중략] 다이스케는 마음속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을 냉소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애 자체가 폴리포니의 효과로서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노포니화는 전술했던 첫번째 문제(‘내면’의 일관성)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남은 두가지의 전도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미 서술했듯 모노포니화란 사회적 관계성의 소거를 의미하며, 따라서 연애하는 주체로서의 순수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각관계의 인식을 소거하기 위해서는, 미치요와의 대화를 연애의 언설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그 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원근법적 도착이 형성된 순간이다. (「문」의 소스케와 오요네가 사회에서 격리된 생활을 보내는 것은, 이 도착으로부터 이끌린 필연이다.)

 이 구조를 만들기 위해, 소세키는 「그 후」의 에크리튀르를 「산시로」와는 크게 다르게, 내면묘사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실은 다이스케의 ‘내면’은 다이스케의 언어와, 그것을 메타레벨에서 의미붙이는 소세키의 언어의 교묘한 혼동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한편, 다이스케의 발화는 폴리포니로서 사생된다. 다른 한편, 그것을 연애의 언어로서 모노포니화하기 위한 소세키의 언어가 개입하여, 그것은 사후적인 의미붙임으로서 다이스케의 ‘내면’을 형성한다. 그려지는 다이스케의 ‘내면’은 연애의 주체로서 ‘열성’적이지만, 실제 미치요와의 관계의 진전은 평범한 언어로서밖에 행해지지 않는다. 이 이중성이야말로 「그 후」의 장치이다. 이것이 ‘사생문적 인식’과 ‘연애’를 동시에 그린다는 과제에 답한 것이라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다.

 「그 후」를 근대인의 고독의 이야기로서 읽는 독해는, 다이스케의 ‘내면’의 레벨밖에 보지 않는 것이다. 

 「문」이후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또 다른 기회에 하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여기서 최후, 「행인」에 있어서의, 이치로의 다음과 같은 언설에 주의해두고 싶다.

 “너 같은 중후한 인간이 보면 나는 참으로 경박한 수다쟁이일 뿐이지. 그러나 나는 이래뵈도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실행하기를 원하고 있어. 실행해야 한다고 아침 저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 실행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까지 외골수로 생각하고 있어."
 [중략]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연구적인 내가, 실행적인 나로 변화할 수 있을까. 부디 가르쳐 줘.” 라고 형이 부탁해 왔습니다.”
 [중략]
 “나는 분명히 절대의 경지를 인정하고 있어. 그러나 내 세계관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절대는 나와 떨어져 버려. 요컨대 나는 그림을 펴고 지리를 조사하는 사람이었어. 그러면서도 각반을 착용하고 산하를 두루 돌아다니는 실지(實地)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하려고 안달 나 있지. 나는 멍청해. 나는 모순이야. 그러나 멍청하면서도, 모순인 줄 알면서도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어. 난 바보야. 인간으로서 너는 나보다 훨씬 위대해."

 이치로가 구하는 것은 단순히 ‘실지’인 것이 아니다. ‘실지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실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분명 ‘실지=열성’으로 향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연애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지로 향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가 ‘실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순환이 그의 고뇌이다. 이것을 실지/조사의 이항대립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분명 연애는 ‘서양의 문예’일 뿐이다. 미즈무라는 이치로를 ‘서양의 문예에 얽매여 붙잡혀버린 인간’이라 논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이치로의 고뇌는 좀 더 복잡하다. 그는 단순히 연애라는 환상에 두근거리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연애(실지)라는 것의 존재에 놀라버리고 있다. 왜냐하면, 상기의 순환에 빠져 버린 이치로에게 있어서, ‘연애’란 불가능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했던 것처럼, 사생문적 인식과 연애의 모순된 관계가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사생문적 인식이란 단순한 ‘조사’, 즉 실지에서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지/조사라는 이항대립이 아닌 곳에서, 대상과의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문에, 사생문적 인식 (절대의 경지)를 인정하고 있는 이치로는, 연애 또한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연애의 경험은 그러한 또한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미칠 정도로 연애를 희구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실지’를 구하고자 하는 운동인 것이 아닌 (에토 준은 여기서 ‘근대인의 고독’에서의 탈출의 시도를 보고, 미즈무라는 그러한 시도야말로 역으로 근대의 환상이라 지적하지만) 오히려 사생문적 인식의 특성에 유래하는 ‘병’(가라타니)인 것이다.

 「한눈팔기」의 겐조는, 자신의 논리는 “손에도 발에도, 신체전체에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감정을 이론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을 이론으로 분절 불가능한 것으로서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겐조=소세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론과 감정이 대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론」의 시도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소세키의 고독감은 단순히 ‘실지’, ‘세간’과 떨어져 버렸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이론과 감정을 대치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태도야말로 세간에서는 ‘이론’이라 보여지고 만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세간’을 착오라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간’을 착오라 하는 것 자체도, 이론/감정, 학자/세간이라는 대립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세키의 고뇌는 여기에 있으며, 「고양이」는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사생문이 연애를 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이치로는 ‘실지’를 구하지 않을 수 없고, 겐조는 감정을 또한 이론으로 포착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것은 항상 자기모순으로서 있다. 사생문적 인식을 보여주면서도 연애를 그리는 것. 그것은, ‘연애’라는 것이 얼마나 ‘전도’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전도의 필연성 또한 그리는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가 ‘진짜’ 사생문인 것이며, 심리소설과 사회소설의 결합은 여기에서 해내진다. 소세키의 독창성은, 단순히 발화의 폴리포니를 사생한 것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모노포니화(=연애화)가 전도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소세키는 그 모노포니화를 또한 ‘사생’하려 했다. 「그 후」 이후의 작품에 있어서, 소세키는 계속해서 이 과제를 추구해 나갔다고 말해도 좋다.


<終>



과제를 하기 싫어서 시작했더니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