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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9 00:38

트윈 테일의 천사 - (1)~(4) 번역


트윈 테일의 천사
ツインテールの天使

~캐릭터ㆍ구제ㆍ알레고리~

てらまっと(twitter id: @teramat)


단지 희망이 없는 이들을 위해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졌다. - 발터 벤야민

0.

 2011년 3월 11일 -- 그 날을 경계로, 오타쿠 문화 또한 변하고 만 것일까? 모리카와 카이치로森川嘉一朗에 따르면 오타쿠 문화는 "영속하는 견고한 일상(과 그 폐색감)”위에 성립해 왔던 것이지만, 이제는 "영속하는 일상이라는 기반 자체에 균열이 가고 있다”[1]고 말한다.  또한 타케쿠마 켄타로竹熊健太郎는 오타쿠적인 표현은 "변질될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타쿠적인 표현은 오타쿠들의 "풍요로운 일상을 전제로 한 라이프스타일”에 의해 지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2]  모리카와와 타케쿠마의 트윗은 당시 큰 찬반 양론을 불러 일으켰었는데, 그때 느껴진 '끝 終わり'의 감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3]

 '끝나지 않는 일상'은 확실히 끝나버렸다.[4] 하지만 그것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지적했듯이 우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는 의미에서이다.[5] '끝나지 않는 일상'이 끝을 맞은 것은, 이른바 '비일상'이라든지 '예외상태'와 같은 것이 전면화했기 때문은 아니며, 더욱이 '세계'그 자체가 끝나버렸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단지 우리들의 '일상' 그 자체가 분단되어, 뿔뿔이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의미를 잃고, 이야기를 잃고, 확률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6] 아직까지 행방 불명인 사람.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 살던 땅에서 쫓겨난 사람. 국외로 탈출하는 사람. 원전을 복구하는 사람.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사람.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 집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 애인과 데이트하는 사람. 아이와 노는 사람. 어떤 이의 '일상'은 끝났지만, 또 어떤 이의 '일상'은 끝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끝나지 않는 일상'도 '비일상'도 아닌, 확률적으로 '끝나기도 끝나지 않기도 하는 일상'이 아닌가. 혹은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寛의 말을 빌리자면, "비일상적인 긴장감을 내포하는 일상"이라 해도 좋다.[7] 어쨌든 그것은 늦던 빠르던 "언젠가는 끝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머금은 '일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예컨대 우노나 하마노 사토시濱野智史가 제창한 오타쿠 문화를 시작으로 하는 "인터넷 문화나 팝 문화에 의한 연대"의 가능성은 아니다. '끝나지 않는 일상'이 풍비박산난 지금, 니코니코동화나 트위터에서 떠도는 문장들 속에서 '연대'의 희망을 보는 것은 어렵다. 물론 이들 서비스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들은 변함없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나 게임 등에 빠져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설들이 잠시 중단되어 침묵이 지배하는 순간, 사람 아닌 자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우리는 저마다의 '끝'을 의식하고야 만다 - 동물적 쾌락에도, 혹은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에도 환원되지 않는, 나만의 단 하나뿐인 '끝'을.

 우리 중 누구라도, 저마다의 '끝나기도 끝나지 않기도 하는 일상'을 품에 안고서, 언젠가 도달하고야 마는 '끝'을 맞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각조각 분열되어 버린 우리들에게, 오히려 '최후의 유대'라 말할 만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환원 불가능한 '끝'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나의 '끝'은 당신의 '끝'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끝'또한 나의 '끝'일수는 없다. 그리고 이 명제가 명확해지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옆에서, 나의 '끝'을 지켜봐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유할 수 없는 것을 분유分有하는 경험이 있으며, 단지 이렇게 해서만 우리들은 희미한 연대의 -혹은 "공동체"의- 잔재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마 '사랑'이란 이런 것임에 틀림없다. 혼자서'끝'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코 하나로 녹아들 수 없는 몸. 어색하게 겹치며 서로를 애무하는 상처 입기 쉬운 두 나신.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끝'에 있어서, 즉 서로의 절대적인 한정성이 노출되고야 마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 그것을 "연인들의 공동체"라고 불렀다.[8]
 
 그러나 그렇다면 죽은 자들은 어떤가. 사람 아닌 자들은 어떤가. 생명 없는 자들은, 교환 가능하고 복제 가능한, 불사의 존재인 '캐릭터'들은 어떤가. 지진 때문에 떨어져서 조각조각 부서져버린 미소녀 피규어를 앞두고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수 있을까 - 마치 가족이나 친구, 애인을 잃은 것처럼. (그림 1)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자의 '끝'을, 서로의 유한성을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또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에 일방적으로 '모에萌え'하고 있었을 뿐이며 이제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아야나미 레이의 너무나도 유명한 대사를 떠올려 보자. "내가 죽어도 대체품은 있으니까요". 그러한 '끝'에서 노정되는 것은, 캐릭터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유한성의 결여이며, 서로의 비대칭성이며, 인간적인 사랑의 불가능성이며, 더 나아가 『상실의 상실』이다.

<그림 1>
 
하지만 그럼으로서, 우리는 서로의 유한성을 분유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즉 사랑과는 다른 방법으로 각각의 '끝'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편재하는 캐릭터의 거대한 눈빛이, 이곳 저곳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함께 있다. 서로 전혀 다른 존재로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기적'의 도래를 절실히 기다리면서. 이것은 결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둘을 구분 짓는 차이를 극복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한성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에 접촉하고, 그러한 접촉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천사에 닿는』 경험이나 다름없다.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본고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공기계空気系 애니메이션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한다(2-5장). 그것은 ‘캐릭터 모에’에 특화함으로서, '끝나지 않는 일상'을 풍요롭게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다음으로, 『케이온!!』 최종화의 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공기계에서 배제되었던 '끝'의 문제를 다룬다(6-10장).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행해지는 '구제'의 전조이며, 천사의 눈길에 닿는 경험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을 단서로 우메라보梅ラボ와 three라는 두 아티스트의 작품을 거론한다(11-14장). 그들은 캐릭터의 일러스트나 피규어를 조각조각 분해하면서 우리에게 상실의 불가능성을 들이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폐허의 알레고리적 부활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이즈 필수요소ルイズコピペ'를 해독하며 본고는 닫힌다(15장).

우리는 일관되게 사랑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차마 논리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전파電波적인 문장이지만, 나는 이 이외의 문체는 생각할 수 없었다 - 라기보다 어느새인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아마 '심야의 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의 연쇄로부터 흩날려 떨어져버리는 것들 속에서, 침묵과 절구絶句 와 오열 속에서야말로 도래하는 일인칭 복수형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시작해 보자.

1.

 '공기계'혹은 '일상계'라 불리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호분샤芳文社의 『만화 타임 키라라まんがタイムきらら』계 잡지에 게재되는 이른바 '모에 네컷'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총칭이다. 1999년에 연재가 시작되어, 이듬해에 애니메이션화된 『아즈망가 대왕』을 효시로 하여, 2007년에 방송된 『러키☆스타』와, 2009년의 『케이온!』 및 그 속편인 『케이온!!』의 대히트를 계기로, 공기계, 일상계 애니메이션은 200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주요 장르 중 하나로 간주되게 된다.

 이들 공기계 애니메이션에서는, 여고생, 여중생들의 실없는 '일상'과 한가한 분위기의 묘사에 주안점을 두고, 다나카 노도田中喉의 지적처럼 "여성 캐릭터의 연애 대상이 되는 남자, 일상 생활을 방해하는 적, 혹은 갈등이나 자의식 문제와 같은 내면적 장애는 작품 세계에서 제외된다"[9]. 종종 공기계 작품에 "명확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10]고 지적받는 이유는, 그것이 원래 네 컷 원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에서 큰일이나 사건을 일으킬 요인이 미리 신중하게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그 동기는 분명하다. 언젠가 "끝"이 보이고야 마는 “이야기"의 구조로는 여고생들의 "끝나지 않는 일상"을 그리기에 불편하다 때문이다.[11]  비록 애니메이션 방송이 종료되어도 그녀들의 빛나는 일상은 언제까지고 계속된다 - 공기계 애니메이션은 예외 없이 그러한 '약속' 위에 성립해 있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다!"가 아닌 "우리의 일상은 지금부터인걸!”이라는 것이다. [12]

 그러나 그렇다면 왜 이런 기묘한 애니메이션들이 시청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 우리들 자신의 삶의 방식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들은 '끝나지 않는 일상'이라는 현실을 살기 위해서야말로, 픽션으로 이상화된 '끝나지 않는 일상'을 요청한 것이다. 『러키☆스타』가 주역이었던 '성지 순례'붐의 배경에는 이 이중화된 '끝나지 않는 일상'-이라기보다는 일상 그 자체를 이중화하려는 끝나지 않는 열정-이 존재한다. 공기계 애니메이션은 '연애'를 배제함으로써 '끝나지 않는 일상'이 이야기화되어 버리는 -즉 '끝'에 직면하는- 가능성을 지우는 동시에 보다 효율적으로 캐릭터에 '모에'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해진다. 극히 단순화해서 말하면 많은 남성 시청자에게 있어서, 작품 내에 이성의 파트너가 있는 캐릭터보다 - 커플링 모에나 관계성 모에라는 것은 물론 있지만- 연애 경험이 적거나 거의 없는 캐릭터 쪽이 더 감정 이입하기 쉽다고 여겨진다. 애니메이션 평론가인 히카와 류스케氷川竜介는 화면 속에 남자 주인공(플레이어)가 그려지지 않는 미소녀 게임과의 연속성을 지적하고 있다.[13]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면 그것만으로 감정 이입의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방송된 『유루유리』에서는 작중에서 남성 캐릭터가 완전히 소멸하고 여중생들 간의 우정과 연애를 코믹하게 그렸고, 남성 시청자의 압도적인 지지를 모았다. 물론 인기의 이유는 그것뿐만은 아니지만[14]  어쨌든 공기계 애니메이션에서의 '캐릭터 모에'의 효율화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캐릭터에게 모에한다는 행동은 바로 '끝나지 않는 일상'을 살기 위해 짜내어진, 하나의 세련된 삶의 작법作法이기 때문이다.

2.

 캐릭터 모에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카피에 아우라를 머무르게 하는 능력"이다.[15] "아우라"란 독일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개념으로, 카피에는 없는 오리지널의 신비적인 권위나 엄숙한 분위기와 같은 것을 말한다.[16] 그런데 우리는 이젠, 오리지널도 카피도 아닌 '시뮬라크르(유사품)'인 캐릭터에서 〈지금, 여기〉일 수 밖에 없는 아우라를 찾아내고야 만다.[17] 그 뿐인가, 닌텐도DS 소프트 『러브플러스』의 히트에서 보듯 우리는 캐릭터와의 의사적인 연애를 즐기는 것마저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역설적인 능력은 어떻게 획득된 것일까.

  잘 알려져 있지만,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캐릭터 모에가 "항상 캐릭터의 수준과 모에 요소 수준의 사이에서 이중화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90년대의 오타쿠계 문화를 특징짓는 ‘캐릭터 모에’란 실은 오타쿠들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감정이입이 아니라 캐릭터(시뮬라크르)와 모에 요소(데이터베이스)의 2층 구조 사이를 왕복함으로서 지탱되는 지극히 포스트모던적인 소비행동이다. 특정 캐릭터에게 ‘모에한다’는 소비행동에는, 맹목적인 몰입과 동시에 그 대상을 모에 요소로 분해하고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상대화한다는 기묘하게 냉정한 측면이 숨겨져 있다.” [18]

 아즈마가 말하는 '모에 요소'란, 오타쿠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다양한 가젯(고양이귀나 메이드복, 학교수영복 같은 시각적 요소뿐만 아니라 달라진 말버릇이나 성격과 같은 설정도 포함)이며, 각각의 캐릭터는 그런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몇가지 요소를 조합함으로써 생성된다. 그리고 아즈마의 생각으로는 캐릭터에 모에한다는 경험은 시뮬라크르로서의 캐릭터에 "맹목적으로 몰입”하면서 캐릭터를 모에 요소로 "분해"하여 다시 데이터베이스로 환원한다(그리고 또 새로운 시뮬라크르를 만들어 낸다)는 왕복 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캐릭터 모에에 보이는 이러한 이층 구조는 오타쿠적 주체의 "해리적"인 위상에 대응하고 있다. 즉 오타쿠들은 시뮬라크르의 생리적, 동물적인 "욕구"과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사교적, 인간적인 "욕망"을 분리하고, 양자를 연결시키는 일 없이 공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Kanon』이나 『AIR』, 『CLANNAD』와 같은 “울리는”노벨 게임(=나키게)에서는 "불치의 병"나 "전생으로부터의 숙명"과 같은 전형적인 모에 요소의 조합(시뮬라크르)에 의한 "효율적인 감정적 만족"이 주어진다. 그것은 아즈마의 말처럼 지적인 감상 태도라기보다는 생리적이고 동물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이른바 "약물 의존적"인 소비 행태이다.[1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타쿠들은 종종 노벨 게임 시스템 자체에 침입하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한 캐릭터나 배경 이미지를 가공ㆍ편집함으로써 새로운 시뮬라크르를 재구성한다. 니코니코동화에 업로드되어 있는 방대한 'MAD 동영상'들은,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평가받고 싶은 오타쿠의 사교적이며 인간적인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해리적인 이중성은 "카피에 아우라를 머무르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캐릭터 모에와 깊이 관계하고 있다. 노벨 게임을 플레이하는 오타쿠들은 그 게임이 멀티 스토리 멀티 엔딩이며, 따라서 "작품 내의 운명이 여러 개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우연히 선택된 눈앞의 분기가 단 하나의 운명이라고 느끼고 작품 세계에 감정 이입하고 있다"[20]. 캐릭터의 "운명"에 울거나 모에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시뮬라크르의 동물적 욕구가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과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의 수준의 동물성과 데이터베이스 수준의 인간성의 해리적인 공존"[21] 이야말로 "카피에 아우라를 머무르게 하는" 역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3.

 시뮬라크르의 동물적 욕구와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인간적 욕망의 해리적인 공존이 캐릭터에 모에한다는 역설적인 행동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이중화된 주체의 성격이 근대적인 초월성(신과 국가와 혁명과 같은 '큰 이야기')의 실추에 의해서 요청 받고 있다는 점이다.

 아즈마가 했던 말처럼 과거에는 각각의 '작은 이야기'(보이는 것)에서 그 배후에 있는 '큰 이야기'(보이지 않는 것)로 소행하며 그것에 의해 아우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큰 이야기'를 잃어버린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는 심층에 '큰 비 이야기'로서의 데이터베이스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표층의 시뮬라크르를 의미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원본과 복사본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도달하려 시도하면서도 결국 시뮬라크르의 수준에서 미끄러지는 수밖에 없다. 이를 아즈마는 "과시적過視的인 포스트 모던의 초월성"이라고 불렀다.[22]  캐릭터 굿즈 또는 2차창작 컬렉션에 대한 오타쿠들의 집요한 열정은 그런 초월성 -이라기보다는 초월의 불가능성- 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캐릭터 모에라는 것은 끝없는 미끄러짐을 황홀감으로 받아들여 몸을 맡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캐릭터 모에가 '끝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작법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동물적인 쾌락과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끝없이 왕복하며 시뮬라크르의 끝없는 미끄러짐에 몰입 -이것이 '큰 이야기'가 실추한 후의 '끝나지 않는 일상'을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삶의 형태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디선가 '끝나지 않는 일상'을 끝내버리는 '커다란 한방'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23]  확실히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을 비롯한 이른바 '세카이계'로 불리는 작품의 유행, 옴 진리교에 의한 무차별 테러 사건의 배후에는 하르마게돈적인 '세계의 끝'을 일으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일상'을 벗어나려는, 로망주의적인 동경이 보인다. 거기서 그려지는 전형적인 동기는 소년과 소녀 둘뿐의 끝나버린 세계  ̶̶ 미야다이의 말을 빌리자면 '핵전쟁 후의 공동성'- 이다.[24]  블랑쇼 또한 "연인들의 공동체"가 "사회의 파괴를 그 본질로 하고 있다"점을 지적한다. “두 존재자가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곳에서는[...] 전쟁 기계가,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대재앙의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분량 자체는 극소라 해도 이 가능성 중에는 전반적인 멸종의 위협이 포함되어 있다”. [2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카이계 애니메이션 애호자가 모두 테러리스트(또는 테러리스트 예비군) 인 것은 아니며, 핵 전쟁에 의한 '세계의 끝'을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명 사회가 멸망하는 몽상에 빠지는 것을 폐색감의 배출구로 하고 있다고 해도,[26] 그것 자체는 별로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며, 그러한 소망은 항상 캐릭터 모에로 탈구되어, '끝나지 않는 일상'으로 회수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에바』에 등장하는 두 여주인공, 아야나미 레이와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아직도 열렬한 숭배자를 많이 가지고 있다. 혹은 세카이계와 공기계의 하이브리드로서 애니메이션화도 된 대인기 라이트 노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참조해도 좋을지도 모른다[27]. 스즈미야 하루히가 지루한 현실 탈출을 꿈꾸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우주인이나 미래인, 초능력자들과 "끝나지 않는 일상"을 구가하는 모습은 이야기와 현실의 뒤틀린 관계를 훌륭하게 그리고 있다. 이러한 공기계와 일상 계열로 분류되는 작품은 우노가 말하는 "확장 현실적인 상상력"에 정확히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외부=〈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월경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물에 어디까지나 침잠하여, 다중화하는 상상력"이다.[28]  혹은 쿠로세 요헤이의 지적처럼 "이제 애니의 리얼리티는 허구 세계의 미니어처 가든에서는 완결날 수 없고, 현실 세계와의 병행으로서만 확보되어 있다"[29]. 있을 리 없는 이야기를 배제하고 캐릭터 모에를 최대한으로 효율화함으로써, 우리의 '끝나지 않는 일상'위에 또 하나의 '끝나지 않는 일상'을 포개는 것. 공기계 애니메이션의 목표는, '세계의 끝'에 대해 도피적인 꿈을 꾸는 일 없이 우리 자신의 '끝나지 않는 일상'자체를 다중화하고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을 충실히 추적하고, 애니메이션의 배경화로 도입하는 수법, 혹은 거기에서 불이 붙은 "성지 순례"붐이 공기계 애니메이션의 유행과 함께 고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30]. 우노, 쿠로세가 언급했듯이 이들 현상은 현실의 장소에 버추얼 정보를 부가하는 "확장 현실 augmented reality(AR)"로 불리는 기술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한다[31]. 알기 쉬운 예로서는, 예를 들어 "세카이 카메라"이라는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애니메이션 『전뇌 코일』(2007)에 등장하는 "전뇌 안경"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면 현실의 풍경 위에 다양한 문자나 화상이 겹친다. 즉 확장 현실에서는, 몇개의 "레이어 layer"의 겹쳐짐으로서의 현실이 구성되는 것이다. “Virtual Reality(VR=가상 현실)에서는 현실 공간과는 독립한 허구의 공간(사이버스페이스)을 만드는 것이 강하게 지향된 반면 AR은 어디까지나 현실 공간에 겹쳐지는 형태로 정보가 배치된다"[32].

 나는 다른 지면에서 복수의 층 간의 인지적인 "차이"가 노출된 이미지를 무라카미 타카시의 "슈퍼 플랫 superflat"과 구별하여, "멀티 레이어 multilayer"라고 부르며, 현실을 다층적인 층구조로 보는 관점을 "멀티 레이어 리얼리즘 multilayer realism"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33]. 투시 도법적인 리얼리즘으로 그려진 배경화(배경 레이어)와 기호적으로 데포르메된 캐릭터(전경 레이어)를 합성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나 노벨 게임 영상은 멀티 레이어인 이미지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혹은 미소녀 피규어를 옥외에서 촬영한 사진이나 Photoshop과 SAI 같은 소프트에서 제작된 미소녀 캐릭터의 컴퓨터 그래픽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영상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 많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오타쿠 문화의 테두리를 넘어 이 새로운 현실 인식의 문제에 임하고 있다.[34]  넘쳐 흐르는 "일상"을 다중화ㆍ다층화하는 시선은 이제 이세계를 원망遠望하는 시선을 대신하여 우리의 몸에 직접 인스톨되고 있는듯 보인다. 우리는 애니메이션의 무대가 된 '성지'에 참배하고 캐릭터 굿즈나 2차 창작을 사 모으며, 질리는 일 없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교환하면서 끝나지 않는 시뮬라크르의 급류에 떠내려간다. 불안정하게 요동하는 층 사이에, 확률적인 '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4.

 공기계와 일상계로 불리는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끝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캐릭터 모에”성분을 공급해 준다. 이 점에서 예를 들어 "공기계에는 이야기가 없어서 지루하다"는 흔히 있는 비판은 당치 않다. 왜냐하면 공기계 애니메이션은 '우주'와 '다른 세계' 같은 이야기적인 '외부'을 소환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에 발을 디디며, 우리의 동물적인 쾌락과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려는 획기적인 삶의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지루한’ 나날에서 탈출하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캐릭터에게 모에하면서 매일 매일을 즐겁게 사는 것. “『러키☆스타』의 등장 인물들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화제로 일상의 생활 공간을 채색하는 것처럼[...] 현대의 소비자들은 그런 캐릭터들을 이용하여 일상 생활 공간을 채색해 간다"[35].

 공기계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등신대의 히로인들은 우리들의 '끝나지 않는 일상'에 다가가, 오늘과 별로 변하지 않을 내일을 살기 위한 아주 조금의 힘을 나누어 준다. 즉 캐릭터 모에에 특화된 공기계 작품은 ‘큰 이야기’의 조락에 대한 뛰어난 ‘세이프티 넷’으로서, 혹은 양질의 ‘서플리먼트’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확실히 "일본의 젊은이는 불행하지 않다”고 단정할 가능성이 있었다[36].

 하지만 수만명의 사망, 실종자가 나온 그 날. 영원히 계속될 듯했던 우리의 일상은 어느 날 갑자기 부서졌다. 더 정확히는 이제서야 가시화됐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그로부터 계속 확률적인 "끝"의 예감에 쫓기고 있다. 하지만 공기계, 일상계 작품은 우리의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을 주고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기계란 명확한 "이야기"를 배제하고 마침내 찾아오고야 마는 "끝"의 가능성을 소거함으로써 끝나지 않는 캐릭터 모에의 왕복 운동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그런 작품의 총칭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기계 애니메이션을이 모두 ‘오와콘’이 됐느니, 혹은 반대로 세카이계가 부활하고 ‘패권’을 잡는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미 말했듯이 각각의 "일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하물며 "세계"자체가 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움/낡음이라는 이분법은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자못 섬세함과 성실성이 떨어진다. 심지어 야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더라도 "끝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삶의 작법은 원리적으로 "끝"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고뇌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며, 언젠가 찾아온 환원 불가능한 "끝"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나 게임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상실"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던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즈마가 예견했던 것처럼, 시뮬라크르가 전면화된 현대 사회에서, 현실 인간의 죽음도 캐릭터와의 이별도, 모든 것이 일원적인 "캐릭터 모에의 그라데이션"으로 회수되었다는 것일까[37]. 먼 재해지의 영상과 미소녀 캐릭터의 화상이 플랫하게 배열되고, 모에(울 수 있는가)의 여부만으로 감정 이입 강도가 정해진다는 -그것이 캐릭터 모에의 정의이며, 과시적인 포스트 모던의 윤리이니까[38].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더욱이, 우리는 그것에서 정말 잃어버린 것, 즉 "상실의 상실"에야말로 눈을 돌려야만 하지 않을까. 이미 부숴진 미소녀 피규어에 "모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얼렁뚱땅 넘길 수도 없다. 캐릭터 모에가 폭력적으로 중단되어,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 간의 왕복 운동이 정지하는 순간. 인간적인 "상실"의 불가능성이 노출되는, 그러한 공백 지대에 머물러 남아 있음으로서, 우리는 각자의 불가피한 "끝"을 받아들여, 파국적인 "세계의 끝"으로 단락하는 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위한 발판이 어디에 있는가. 2000년대 후반의 공기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끝"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특이한 애니메이션이 존재한다. -  바로『케이온!!』 이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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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알게 된 트위터 지인(@teramat)의 글로, 동인 비평집인 セカンドアフター vol.1에 실린 케이온 비평글입니다.
읽어 보니 상당히 취향 직격이기도 하고 재미가 있어서 (무라카미 씨의 고스트론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내용) teramat 씨의 허락 하에 번역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원작자의 허락을 받고 하는 번역은 이게 처음인 듯...
최근 취직했기 때문에 그다지 시간이 없습니다만, 시간 되는 대로 차근차근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무척 긴 글이기 때문에, 예전 번역했던 글들처럼 밤 새서 한번에 번역하는 짓은 불가능할 듯...

덧글

  • 蒼雲 2016/05/10 12:19 # 답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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